I. 서 론
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에른스트 마이(May, E.)는 1920년대 중후반 프랑크푸르트에서 진행된 일련의 모더니즘 성향의 주거단지 작업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에른스트 마이와 신 프랑크푸르트 운동의 주거단지들은 독창적이고 급진적 부분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점, 작업 상당수가 계획대로 완결되지 못했고, 천명하던 가치들이 많은 부분 실패로 귀결되었다는 점으로 인해 동시대 건축적 아방가르드 및 거장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작업 자체를 미진함이 아니라, 근대성과 합리성에 대한 독자적 해석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로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이다.
이에 본 연구는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프랑크푸르트의 정황을 바탕으로 에른스트마이가 노동자 계층에 대해 가졌던 인식을 확인하고, 근대성을 실현하는 방식으로써의 합리성을 이해하게 된 과정과, 이것이 신 프랑크푸르트 운동의 주거단지에서 구현된 방식을 고찰한다. 이는 1900년대 초반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노동자계층과 노동운동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을 그들의 작업에 어떻게 반영하였는가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에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2. 연구의 흐름 및 방법
연구의 편의성을 위해 에른스트 마이와 신 프랑크푸르트 팀이 진행한 작업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동일한 목표를 위해 수행되었다는 전제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실제로 협업을 통해 구축된 작업에서 마이와 다른 동료들의 작업의 범위와 결과물을 엄밀히 구분하는 것이 쉽지않을 뿐더러 신 프랑크푸르트 잡지 등을 통해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거쳤으며, 프랑크푸르트 도시계획과 주거단지에 대한 계획 및 집행의 총 책임자로서 마이의 통제를 벗어난 작업이 구현되었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기 때문이다. 또한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니다 계곡의 주거단지를 주요한 분석 대상으로 다루되, 다른 사례들에 대한 내용도 해석의 폭과 깊이를 위해 포괄적으로 다루었다. 이는 본 연구의 주된 방향이 마이와 신 프랑크푸르트 주거단지의 이해를 위한 큰 밑그림을 그리기 위한 것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 바탕으로 본 논문은 2장에서 1차 대전 전후의 독일과 프랑크푸르트의 정황에 대한 고찰을 선행하고, 에른스트 마이와 신 프랑크푸르트 운동의 역사를 개괄하여 이해를 위한 공통의 근거를 마련한다. 3장에서는, 1, 2차 자료에 대한 문헌조사를 중심으로 에른스트 마이의 노동자 계층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여, 마이가 노동자 계층에 대해 가졌던 인식의 복합성과 대립성을 확인하고, 4장에서는 마이의 노동자 계층 인식이 합리성의 공통분모 아래 주거단지 전반에 걸쳐 어떻게 반영이 되고 있는지를 연계하는 순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II. 배경적 고찰
1. 1차 대전 전후 독일과 프랑크푸르트의 정황
중세 이래 프랑크푸르트는 성벽이나 도로가 확장하는 방식으로 성장했다.<Figure 1. a), b)>1) 제일 안쪽에는 도심의 주도로인 차일 링(Zeil Ring)이 있고, 그 바깥에는 나폴레옹 시기 성곽을 허물고 해자를 메꿔서 만든 안라그 링(Anlage Ring), 도시 주변부에는 아디크스(Adickes, F.) 행정부 때 건설된 링슈트라쎄(Ringstrasse)가 있었다. 20세기 초에 순환도로 사이에 계획되었던 넓은 개방공간이 채워지면서 주거를 위한 여지는 이미 거의 없었다. 1차 대전이 끝나자, 도시주택공급문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외부인의 투자와 방문에 크게 의존했던 경제상황은 전쟁으로 붕괴되었고(Mendelssohn-Bartholdy, 1971), 주택공급은 거의 중단되었다. 1918년 1차 대전 종전 시 주택공급은 1913년 전쟁 1년 전에 비해 1퍼센트도 늘지 못했다(Fey, 1936; Mullin, 1977 재인용). 인구는 전쟁난민의 유입과 군인의 귀환으로 짧은 시간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Diehl, 1974). 극심한 주택부족으로 군대막사를 주거용으로 공공에 개방할 정도였다(Diehl, 1974). 이 와중에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시당국의 행정 역량은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은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계층의 가정에 훨씬 가혹했다. 그들은 사용연한을 넘긴, 안전성이 떨어지고 비위생적인 건물에서 살아야 했다. 행정의 공백을 틈타, 기존의 공지를 메꾸는 식으로 다수의 중정형 임대주택(Mietskaserne)이 투기자본에 의해 지어졌다. 하지만 이들은 건강한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조, 환기, 급수/오수 처리-조차 제공하지 못하는 수준이었고<Figure1 c)>, 도시의 과밀은 결핵사망자와 유아사망률, 성매매와 술과 관련된 범죄 증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Henderson, 2013).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세력이 권력을 가지면서 보다 급진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새로운 권력자들은 충분한 주거공급과 적절한 도시계획이 시민의 복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주택건설에 소요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실제 부동산 소유주에게 임대소득에 대한 세금을 물리는 주택임대세(Hauszinssteuer)가 도입되면서, 새로운 주거단지를 위한 조치들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실제로 1924-1930년 사이에 독일에서 165만이 넘는 주호가 이 세금에 기반하여 건설되었다(Mumford, 1933; Mullin, 1977). 또한 이 법을 통해 도시계획가들은 대규모 계획을 실현시킬 경제적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공적 지원과 정치적인 지지 세력의 확보, 언론의 협력을 통해 주거단지 건설을 위한 기반이 조성되자, 프랑크푸르트 시장 란트만(Landmann, L.)은 에른스트 마이를 새로운 사업의 적입자로 보았고, 그를 도시건축가(Stadtbaurat)로 임명하였다.
2. 에른스트 마이의 작업과 신 프랑크푸르트 운동의 전개
에른스트 마이는 1886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1908년 영국 런던에서 건축을 전공하던 중, 1910-1912년 전원도시의 주창자였던 레이몬드 언윈(Unwin, R.)의 사무실에서 일했다. 이후 독일로 돌아와 건축공부를 마친 후, 1920년대 초까지 여러 토지개발 및 주택 건설회사에서 건축, 도시계획, 기술자문에 관련된 작업을 수행했다(Sohn, 2003). 1925년 그는 독일 공작연맹(Deutsche Werkbund)의 회원이 되었고, 그로피우스(Gropius, W.), 샤로운(Scharoun, H.), 미스 반 데어 로에(Rohe, M.)와 함께 링(Der Ring)을 조직했다.2) 이 과정에서 마이는 다양한 사상과 접근방식을 수용하였다. 언윈과 테오도르 피셔(Fischer, T.)로부터는 전원도시의 이상을, 독일공작연맹과 링으로부터는 신건축(Neue Bauen)과 새로운 생활(Neue Leben)에 대한 개념과 미학적 이해를 수용했다.
마이는 도시건축가로서 조닝, 계획, 재정의 조달 및 실행, 표지물(signage)의 제어, 완공 건축물의 검수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주택건설을 위한 협력업체의 선정과 관리를 담당하였으며, 건축 잡지 신 프랑크푸르트(Das Neue Frankfurt: DNF)의 편집인이 되었다. 그는 신속하게 직원들을 고용하여 도시의 물리적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전반적 계획들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Mullin, 1977).
마이와 그 동료들은 전원도시를 재해석하여, 위성도시 성격이 강한 주거단지를 계획했다. 그 결과 각각의 정착지는 길과 인프라, 대중교통 노선들로 모 도시와 묶여 있으면서도, 모 도시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주거환경 조성을 기획했다. 결과적으로 계획가들은 주거용 건물이외에 학교, 예배당, 주민자치시설, 상점, 운동장, 정원 그리고 작업장을 디자인해야 했다. 또한 장인들과 법률가, 의료진들을 위한 공간을 따로 두어 단지의 자율적, 독립적인 성격과 거주자의 소속감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새로운 이주민을 수용하고 결혼과 출산을 기반으로 하는 독립적인 주거를 확대 재생산하고, 도심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인 후 구 도심을 개선시키는 것이 다음단계의 목표로 상정되었다.3)
이는 즉각적인 효과를 일으켰다. 신 프랑크푸르트운동이 시작된 1926년과 1927년, 프랑크푸르트는 독일 7대 도시 중 가장 큰 건설 사업을 수행했다. 이 당시 시민 1000명당 204채에 해당하는 주거유닛이 건설되었다. 1933년, 프랑크푸르트의 주거단지 조성 프로그램은 15,000호가 넘는 새로운 거주 유닛을 조성하였다. 이는 프랑크푸르트시에서 1926-1933년 지어진 모든 주택의 90%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하지만, 주택임대세의 과세가 한계에 부딪히자,4) 마이와 그의 동료들은 사업추진 동력 상당부분을 잃었다. 경기가 침체하고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들의 실험은 공산주의적 배경과 반독일적·반아리안 적이라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에른스트 마이가 1930년 러시아로 이동하고, 1932년 브뤼닝(Brüning) 수상이 사임하게 되면서 프랑크푸르트의 도시계획프로그램은 완전히 끝이 나게 된다.
3. 에른스트 마이의 근대성과 합리성
에른스트 마이는 주거단지프로젝트의 주 거주자로 노동자계층을 상정하였다. 그는 DNF를 출간하면서 자신과 동료들의 생각이 지역적 한계를 넘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잡지는 사진, 영화, 운동, 미술, 무용, 자동차, 패션 등 대단히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지만, 대부분 근대성에 대한 특정한 시각-근대성을 어떻게 내재화하는가-을 강조했다. 마이는 근대적 산물들이 가지는 ‘교육’적 기능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노동자계층이 새로운 문화를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새로운 인간이 되는 데 교육이 핵심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Heynen, 2008).
그는 교육을 통해 합리성을 전제로 하는 근대적 개인들을 양성할 수 있으며, 새로운 생활이 가능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새로운 생활을 위해서는 합리성을 배울 수 있는 형식(새로운 건축)과 내용(주거문화)이 필요하고, 이는 기능성과 경제성을 전제로 했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마이는 프랑크푸르트 도시계획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이전이었던 1924년 이미, 나중에 최소주거(Existenzminimum)로 명명될 작업 속에서 주거 유형의 규모를 감소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했다. 스스로 가사에 참여하고, 정원에서 경작지를 일구며, 주거에 딱 맞게 디자인된 빌트인 가구를 포함한 주거유닛에 대한 작업은 19세기의 관습과 결별한 새로운 생활에 대한 지향을 드러낸다. 여기서 보이는 원칙들은 거의 그대로 단지계획에 반영5)되었다(May, 1924a; May, 1924b; Henderson, 2013에서 재인용). 마이가 당대의 사상을 통합하여 주거에 대한 새로운 가치로 생각했던 주거문화(Wohnkultur)의 배경에는 이러한 인식이 동반되어 있었다(Barhrdt, 1969).
III. 에른스트 마이의 노동자계층 인식
1. 해방과 훈육 프로그램의 수동적 객체
마이와 그의 동료들에게 주거문화를 통한 노동자 계층의 해방은 물리적 환경의 변화가 정신적 차원의 변화를 수반하리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마이와 그의 동료들은 주거단지를 교육의 장치로서, 노동자들을 훈육하는 시스템으로 실행하였다.
하지만, 노동자 계층을 ‘교육’하기에는, 당대 건축적 아방가르드들의 작업이 너무 높은 지적 수준과 경제적 여유를 전제한다고 마이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마이에게 근대적 대상을 대하는 시민들의 경이에 찬 태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노동자계층에게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적절히 제공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이유로 마이의 교육은 문화를 반복적으로 체험하면서 체득되는 성질의 것이었으며, 이를 위한 가장 좋은 환경은 주거 자체였다. 주거는 새로운 생활을 위한 인큐베이터였던 것이다(Gropius, 1956).
이 과정에서 마이와 그의 동료들은 거주자를 균질하고 경직된, 동일한 성격의 대중으로 규정했다. 이는 근대적 개인의 또 다른 특징인 자유로움, 유동성, 일시성과 같은 것들을 담아낼 수는 없었지만(Heynen, 2008), 노동자계층을 특정방향으로 훈육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층의 성격을간결하고 명쾌하게 단순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에른스트 마이는 노동자계층의 해방을 도모하면서도 그들 스스로의 자율적 역량과 주체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낮게 평가함으로써 그들이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순응하는 대중이 될 것이라는 것을 ‘가정’하면서 작업을 진행했다. 그들의 작업은 자율적 교육보다는 반복을 통해 습득되는 훈육의 성격을 강하게 담지하게 되었다.
2. 소요비용 기준에 따른 차별적 태도
마이는 비용감축을 위해서라면 공정성과 정당성을 훼손시킬 여지가 있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조치를 취했다. 비공식적이고 암묵적인 기준을 통해, 실업자, 복지부 민원인, 장애인, 퇴역군인, 노인들을 우선적으로 현장에 투입했다. 업체 선정과 노동자 고용에 대한 공지가 있기 전에 대부분의 계약은 대형업체와 체결되어 있는 상태였으며,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은 이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세금납부자에게 일괄지급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자유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시장에 대한 명백한 침해였다. 이 때문에 마이는 개별적으로 계약을 진행하는 숙련 노동자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다. 마이는 숙련노동자를 비용증가의 요인으로 여기고, 숙련공을 요하지 않는 공법과 건설 기술들을 꾸준히 개발했다(Stephenson, 1975). 숙련도가 낮은 노동자를 고용하는 비용절감 ‘기법’이 일반적으로 적용되면서 숙련 노동자들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십년동안 숙련된 건축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실업률을 보였다.
마이가 건설비용 감축에 이토록 고심했던 것은 건축비자체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렌텐마르크(Rentenmark, RM)를 통해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통제할 수 있었지만,6) 건설비용은 1914년과 1929년 사이에 거의 두 배가 올랐고, 금리는 250% 상승했다. 마이와 그의 동료들은 건설비용과 임대료를 낮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실업률이 다시 문제였다.7) 마이가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합리성은, 노동시간의 감소와 임금삭감, 실직의 위기 속에, 숙련노동자들에게는 ‘위기’로 인식되었다. 경제성을 구현하기위한 ‘합리적’ 사고를 건축에 적용하게 되자 숙련노동자계층의 실직과 불완전 고용이 증가하는 상황을 초래했고, 결과적으로, 애초에 기획되었던 입주자의 주 계층과 실제로 입주가 가능한 계층이 분리되는 모순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8)
3. 엘리트주의와 사민주의의 공존
마이와 신 프랑크푸르트 운동의 주창자들은 주거문제를 사민주의적 입장에서 양호한 공간의 평등한 공급과 지속의 차원에서 접근했다. 특히 마이와 그의 동료들이 실제로 제공한 주호의 개수를 고려해 보면 그들이 기본적으로 주거의 평등한 제공을 얼마나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9)
사민주의적 태도는 마이와 신 프랑크푸르트 운동의 주거단지에서 계획된 다수의 주민 편의 시설을 통해서도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주거단지에서 거주민에 의한 커뮤니티 형성에 공을 들였다. 공용공간과, 과수원, 공동세탁소, 학교와 유치원(이상 프라운하임), 주간보육시설과 협동조합 상점, 커뮤니티 센터, 예배당, 게스트하우스, 공동세탁소, 극장, 청소년 체육시설(이상 뢰머슈타트)등의 공용시설들은 주민들의 모임, 커뮤니티 축제 및 행사의 거점이 되면서 새로운 주거(Neue bauen)의 근간을 구성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마이는 기본적으로 엘리트관료로서, 시혜자의 입장에서 계획을 집행했다. 마이는 민주주의적 과정 보다는 노동자계층의 곤란함을 해결해 내는 것이 도시계획의 개념으로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공무원이자 계획가로서 마이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 가장 잘아는 것이 본인이며, 이를 잘 구현할 능력도 자신에게 있다고 확신했다(Mullin, 1977). 에른스트 마이가 저돌적으로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비스마르크 이후 공공에 의한 통제가 체제 순응으로 귀결되는 당시 독일 사회 분위기(Toll, 1969; Mullin, 1977)”도 한 몫을 했다.
실제로, 거주자들은 집과 정원의 유지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강제퇴출이 가능하다는-입장에 따라서는 개인의 주거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내용이 계약서에 포함되었다. 마이는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기준에 의해서 선정하지 않았다. 주거자들은 ‘거주해도 되는 특징을 갖추었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 결과 도시에 살아본 경험이 있는 전쟁미망인, 재향군인, 그리고 구원이 절박한 대가족이 우선적으로 입주했다. 정착지에 머무르기 위해 거주자들은 모범시민이 되어야 했다. 그들은 규정을 준수할 정도로 강직하고 재정적으로도 안정되어 있는지 확인된 다음에야 입주에 우선권을 가지게 되었다(Henderson, 2013).
핵가족에 대한 입장에서도 엘리트 관료의 입장이 확인된다.10) 마이가 생각한 근대적 핵가족의 핵심은 집안에 머무는 부인의 존재였다.11)하지만 독일 가족구성의 실상은 매우 복잡했다. 1차 대전 종전 직후 30%의 가정은 어머니가 바깥일을 하고 있었고, 많은 가정이 하숙을 치거나, 부양능력이 부족한 부모가 남기고 간 아이들을 같이 데리고 살고 있었다(Henderson, 2013). 마이와 그의 동료들은 노동자계층의 핵가족을 새로운 삶을 주도하는 주 거주자여야 한다고 믿으면서 작업을 진행했다. 실재하는 비율과 거리가 있는, 이상적인 핵가족을 당위의 차원에서 주 거주대상으로 간주하면서 계획을 강행한 것이다.
에른스트 마이가 노동자계층을 바라보는 시선은 복합적이고 대립적이었다. 노동자계층의 구원과 해방은 근대적인 개인을 양성하는 방향을 향했지만, 그 형식은 자율성을 최소화하여 주거와 일상생활을 통한 수동적인 훈육의 성격을 띠고 있다. 경제성 구현의 차원에서 노동자를 기술수준과 인건비로 구분하여 비용을 낮추고자 했지만 이자체가 노동자계층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상황을 초래했다. 계획에서는 사민주의와 평등주의적 입장을 견지하지만 집행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엘리트 관료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적 인식은 신 프랑크푸르트 주거단지 계획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IV. 신 프랑크푸르트 주거단지의 합리성 구현방식
1. 전통에 대한 유연한 해석
마이의 계획은 전통에 대해서 배격(도시상황)과 존중(교외전원)이라는, 복합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마이는 언윈의 전원도시, 피셔의 낭만적 도판들, 식량난을 경감시킬 수 있는 경작지 정원 조성에 대한 생각을 그의 단지계획에 반영하였다.
마이의 이러한 생각이 시 정부에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게 된 데에는 독일에서 독자적인 전원도시개념의 발전해온 토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전원도시 협회(Deutsche Gartenstadt Gesellschaft, DGG)는 “영국보다 더욱 이상적이고 현실적으로”, “사회주의자를 키우고 협동조합과 개혁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며 동시에 애국주의자(nationalist)와 자본주의자, 독일의 토착적 가치(Lejuene, 1996)” 역시 외면하지 않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사회민주당과 연계하여, 정치성을 배재하면서 노동자의 만족을 중심에 둔 도시개혁을 시도했다(Bergmann, 1970).
마이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 이미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헤르베르트 뵘과 함께 진행한 보이슈비츠(Woischwitz) 정착지계획안(1923)은 뚜렷한 축을 드러내는 내향적인 중심 공용공간, 픽쳐레스크한 느낌을 주는 타원형태의 연립주택, 외부에 정원과 결합한 시골주택(Homestead)형식의 주동 구성을 통해 전통에 대한 전원도시적 참조를 보여준다.
1926년 지어진 프라운하임 I (Praunheim I)에는 보이슈비츠와 마찬가지로, 교외 시골주택의 전통이 반영되었다. 남측면의 주거들은 과실수가 식수된 전정을 가지고 있었고, 북쪽에 입구를 둔 주거들은 남측에 분구정원이 조성되었다. 다마쉬케앙거슈트라세(Damaschkeanger strasse)를 따라, 경사가 약간 있는 지형에서 각 주거유닛들과 맞닿은 길은 다시 계곡 쪽 공원으로 연결되고, 남동쪽으로는 분구정원들과 세탁물을 건조하는 마당과 목초지가 열려있다. <Figure 4. a), b)>이로 인해 전체적인 단지 분위기에 목가적 성격을 강하게 부여된다.
뢰머슈타트(Römerstadt)는 언윈이 전통 성곽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12)을 충실히 반영한 작업이다. 시의 원형외벽을 뜻하는 링마우어(der Ringmauer)가 경계를 따라 조성되고, 기존 황무지에서 자라던 히드의 이름을 따라 히드슈트라쎄(heidenstrasse)라는 이름을 붙었다. 로마와 연관된 미트라슈트라세(Mithrasstrasse), 하드리안슈트라쎄(Hadrianstrasse)와 같은 이름은 로마시대에 지어진 성곽13)과의 연관성을 드러낸다. 남쪽 경계에는 고대 로마를 떠올리게 하는 연상기호로서 벽체를 설치하였다.

Figure 4.
Acceptance of Properties of Garden City
Source. a) DNF, 4 (2/3), 66; b) DNF, 2 (7/8), 130; c), d), e), f) DNF, 4 (4/5), 77-84
이 벽체는 요새(bastion)처럼 생긴 돌출부와 돌출된 아파트 주동부분, 남서쪽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며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된 광장 디자인에 의해 더욱 두드러진다. 정착지를 통과하는 보행로에 연결된 계단은 아래쪽에 있는 공원과 분구정원으로 이어진다.<Figure 4. c), d), e)> 이 벽체들은 햄스테드 전원교외(Hampstead Garden Superb)에서처럼 히스 덤불이 단지로 넘어오지 않도록 하고 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벽체는 중세에 대한 의고적 태도 혹은 외부에 적대적인 경계가 아닌, 정착생활에서의 개척과 유목적 낭만성이 만나는 경계로 기능한다.
하드리안슈트라쎄 끝에는 슈스터(Schuster, F.)가 설계한 4층짜리 아파트 건물이 자리한다. 레벨이 다른 옥상들로 연결된 상부는 대지의 고저차를 강조하며, 콘크리트 패널 발코니를 통해 모더니즘건축의 기능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이 건물의 발코니들은 근대적 형태와 낭만적 조경을 결합하며, 헴스테드전원교외와 목가적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Figure 4. b), e), f)>.
일조와 채광, 환기에 대한 태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신 프랑크푸르트 단지계획의 중후반 시기 작업에서 주동배치는 차일렌바우(Zeilenbau)로 불리게 되는 개방열 구조를 취하게 된다. 리트호프(Riedhof) 정착지는 녹지와의 관계가 전원도시에서 개방열 계획으로 넘어가는 전이단계에 속하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서측 리트호프베스트(Riedhofwest)는 도시건축의 전통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단지는 19세기 독일 도시의 특징인 중정형 건축물을 참조한다. 리드호프베스트의 주거동의 양단은 거리에 대해 90도 방향으로 꺾어져 차일렌바우의 개방열의 장점을 취하는 동시에 중정과 비슷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로 인해 주거의 기능성이라는 측면과 가로에 면한 파사드라는 전통적 요소가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결합되어 있다. 특히 동쪽의 빌헬름슈트라쎄(Wilhelmstrasse) 측은 작은 고리형태의 위요공간을 구성하면서 가로와 중정사이의 중간적 매개공간을 두고 있다.
2. 위생개념의 적용과 확장
에른스트 마이는 위생의 구현을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고려하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과밀을 ‘위생상의 후퇴’로 해석했다. 또한 이러한 위생상의 후퇴가 물리적 조건뿐만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삶의 후퇴까지 야기하는 것으로 보았다.14) 1925년 바이마르 공화국 전체로 보면 평균적으로 5명으로 구성된 노동자계층의 가정은 1.4개의 불과한 좁은 방에 거주하고 있었다(Winkler, 1985).
위성도시(Tranbanten) 개념 역시 위생성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브레슬라우(Breslau) 계획안에서 마이와 뵘은 도시를 일종의 병든 몸으로 간주하면서 도시계획가를 외과의사로서 간주하고 있다. 도시중심부와 연계를 유지하면서 이 위성도시들은 “명쾌하게 연계된 신체기관(Boehm, 1925)”을 은유하며 이를 위한 위생과 건강의 필요성을 반영하고 있다. 니다계곡에 조성된 정착지 또한 이에 부합한다. 프라운하임 I, II, 뢰머슈타트, 베스트하우젠(Westhausen) 정착지는 전원교외의 성격을 가진, 낮은 층수의 “위생적 건물(Flachbau)”로 채워졌다(Schumeyer, 1930).
위생에 대한 관념은 사회적 차원의 윤리와 근대적 가치습득을 위한 훈육의 논리와 결합했다. 마이와 그의 동료들이 상정했던 핵가족에 맞는 주택의 원형은 도덕적 원리에 기반을 두는 위생적인 주거제공을 포함하는 것이었다(Henderson, 2013). 침실과 침대를 공유하고 하숙이 일반화된 당시의 주거환경은 윤리적인 영역에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초기 작업이었던 프라운하임Ⅰ과 부르흐펠트스트라쎄(Bruchfeldstrasse) 단지에서는 하숙인을 위한 공간이 포함되었지만, 하숙은 점차적으로 퇴거까지 가능한 불법행위로 규정되었다.

Figure 6.
Realization of Physical/Social Hygiene
Source. a), b) Henderson (2013), 144-154; c), f) Henderson (2013), 102; d) DNF, 2 (7/8), 170; e) DNF, 4 (11), 210; g) Henderson (2013), 401; h) DNF, 3 (11), 209-214
기능에 따라 공간을 구분하고, 최소화된 공간에서 최대한의 기능성을 위한 공간을 찾는 디자인 또한 위생을 구현하는 차원에서 재규정되고 있다<Figure 6. e)>. 주부를 위한 공간인 주방이 분리되었고, 세탁은 독립된 공간에서 이뤄지거나 단지차원의 공동 세탁장에서 처리되었다. 욕실과 주방은 주거공간의 위생성이 구현되는 핵심적인 공간으로, 세탁소와 같이 공용시설로 편입되지 않았다. 노동자 계층의 주거에 욕실이 포함된 것은 프랑크푸르트 정착지가 처음이었다. 이러한 공간들은 위생을 기반으로 기능성과 경제성, 나아가 윤리성이 추구되었다. 열차의 식당칸을 연상하게 하는(Mullin, 1977) 주방은 리호츠키(Lihotzky, M.)가 디자인한 것으로, 고도로 기능적인 방식으로 조합되었다. 작고 촘촘한 공간에 스토브와 냉장고, 싱크대, 수납장과 조리대 상판을 구성한 프랑크푸르트 주방은 공간의 압축과 기능성의 정점을 보여준다. 주방과 마찬가지로 욕실도 최소크기에 대한 계획이 진행되었다. 뢰머슈타트의 욕실은 4 m2에 불과했고, 욕실 내부의 욕실의 구성요소인 세면기와 변기, 욕조는 통합적 유닛으로 제안되었다15)<Figure 6. a), b), c), d)>.
다른 공간에서도 위생은 기능성에 대한 기준이 되었다. 사용자 수가 많은 거실은 상대적으로 큰 면적으로 구획되었고, 가족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대응하고 청결을 유지할 수 있도록 움직일 수 있는 가구로 공간이 구성되었다. 화장실에는 수세식 욕조와 변기를 설치하여 집안 곳곳에 물통을 두는 공간(water Figure)을 두지 않음으로써 물을 쓰는 공간과 아닌 공간이 완벽히 분리되었다. 다림질은 ‘주부의 일’이었지만 별도의 공간으로 분할되지 않았다. 물을 쓰는 작업이 아닐뿐더러, 가족과의 교류가 가능한 행위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침실이 독립하여 개인적 공간이 되면서 윤리성을 구현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Figure 6. f)>. 위생을 저해할 모든 요소는 주거유닛에서 소거되었다(Hagen, 1930). 출산과 사망은 주택이 아니라 적절한 의료서비스가 제공되는 곳에서 이루어졌고, 심지어 방문자를 위한 공간도 게스트하우스로 분리되었다.
차일렌바우의 도입은 위생에 대한 관념과 경제성 구현을 연계하여 배치계획을 진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라운하임 II에서는 프라이버시, 환기, 자연 채광, 녹지공간의 균등한 제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베스트하우젠(Westhausen) 정착지에서는 차일렌바우를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아파트들은 통과도로에 수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대로들은 주동들과 평행한 보행자 도로에 의해 서로 수직으로 연결되었다. 주동열 끝은 개방되어 있고, 주동간격은 각 주거유닛이 최대한의 일조가 가능하도록 결정되었다. 이를 통해 단지 내부의 공기질, 소음, 안정성 측면에서 개선이 혁신적으로 이루어졌다. 단지 안에서는 차량을 이용한 교통을 제한하여 단지 주변만 순환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주거 유닛의 깊이는 방 2개 이하로 제한되어 양호한 채광조건을 만족시켰다<Figure 6. g)>.
자금압박과 함께 마이와 그의 팀은 점점 더 자연채광을 배치계획에 강박적으로 적용하게 되었다. 발터 슈바겐샤이트(Schwagenscheid, W.)의 연구를 바탕으로, 프랑크푸르트의 계획가들은 주호의 각 실에 필요한 정확한 방위와 위치를 결정하였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단지 초기 전원 도시적 입장에서 구현되었던 주거환경의 질적 측면을 기능적/과학적인 시각에서 재정립했다. 그는 4층 규모의 아파트 복합 군에서 1층 주거에 충분히 채광이 가능한 거리를 가늠하여 150피트라는 결론을 도출했다<Figure 6. h)>.
물리적, 사회적 위생의 관점에서 진행된 이러한 조치들은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다. 1920년대 지어진 프랑크푸르트의 새 정착지에서 혼외출산비율은 5%로 시 평균 15%와 도심지의 20%에 비해 뚜렷하게 낮은 수치를 보여준다(Wickham, 1983). 주거환경에서 일어나는, 혹은 주거환경에 의해 발생하는 발병률도 감소했다. 이를 통해 건강은 ‘공적 가치’가 되었다. 1929년에는 주거단지 내 출산의 63%가 병원에서 이루어졌다(Neisser, 1930). 마이와 프랑크푸르트 주거단지에서 위생은 물리적 환경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는 위생개념을 사회적 윤리와 근대성을 학습하는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합리성은 이들 요소들이 공유하는 교집합이 되어 단지에서 개별 주호에 이르기까지 균질하게 구현되었다. 합리성에 대한 개념은 산업시대의 논리와 결합하면서 대량생산과 표준화에 대한 논리로 확장된다.
3. 대량생산과 표준화에 대한 대응
에른스트 마이와 그의 동료들은 건설과정의 산업화와 공간사용에서 테일러리즘의 원리를 우선시하였다(May, 1926/27). 그들은 자본주의 맥락에 있어서 이러한 발달된 기술의 합리적 성격이 그들이 생각하였던 사회의-동일한 권리와 동일성에 기반을 둔 사회-합리성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확신하였다(Heynen, 2008). 합리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높은 생산성을 담보해야 했으며, 이를 위해 행위와 공정을 정교하게 조직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합리성에 관한 신화를 창조한 미국의 사례는 독일의 전문가, 사업가, 그리고 정치가들 사이에 합리성에 대한 열광을 부추겼다. 헨리포드의 T형 포드 자동차에서와 같이 합리성의 추구와 대량상산시스템은 각 분야에서 독점적 지위의 재력가들을 만들어 냈지만, 동시에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치스런 물건들을 노동자 계층이 구입할만한 가격으로 시장에 제공할 수 있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Henderson, 2013).
마이는 이 관점을 주거단지에 적용하려 하였다.16) 경제성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러한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디자인은 가능한 간결하면서 높은 효율성을 발휘해야 했다(May, 1929). 동선을 짧게 하고 공간을 효율적으로 계획하고자 했던 디자인 방식은, 공기단축과 비용절감에 효과가 있음이 드러나자 비로소 합리적인 가치를 구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이는 주거크기를 경제성과 합리성의 차원에서 해석했다. 그는 크기가 작은 공간이 많은 가사노동을 경감하고, 휴식을 쉽게 하며, 더 많은 여가시간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었다. 가사노동은 기능적으로 수행되어야 했으며, 두 손만으로 가능한 방식으로 처리되어야 했기 때문이다(Henderson, 2013).
창호, 문, 문고리, 조명기구, 자물쇠, 우편물 투입구 등과 같은 디테일요소부터 대량생산된 제품을 적용하였다. 프랑크푸르트 표준화 사무소는 “소형 주거를 위한 프랑크푸르트 규준(Frankfurter Normen für Kleinwohnungen)”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발행하였다. 여기서 검증되는 물건들은 모두 계약을 통해 대량생산 것이다. 몇몇 제품은 프랑크푸르트 등기부에 실렸고, 숫자가 매겨진 일련의 개별 제품들은 산발적으로 DNF에 소개되었다. 선정된 각각의 제품은 “목적에 충실하고”, “다른 사치품에서 볼 수 없는 형태”로(Winchert, 1928),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Figure 7. a)>.

Figure 7.
Reflection of Standardization and Mass Production
Source. a), b) DNF, 4(2/3), 41-42; c) DNF, 1(2), cover; d) DNF, 1(2), 34
표준화와 대량생산에 의한 제품들은 점점 더 많이 활용되었다. 표준화된 평면, 벽체 패널, 중앙난방, 표준화된 배관, 평지붕, 조립식 벽체 시스템, 빌트인 가구 등 주택의 모든 물리적 구현 요소에서 대량생산시스템을 적용하려 하였다. 1927년 프랑크푸르트 시 정부의 건설부처는 21개의 주거유형을 개발하였고 이는 니다계곡의 많은 주택에서 활용되었다.
다른 모더니즘 건축가는 평지붕을 근대적 미학의 관점으로 접근했지만 마이는 비용감소 측면에서 이해했다. 마이는 실험을 통해 다양한 지붕의 각도와 그에 따른 하부 사용가능 면적, 재료의 견적과 인건비를 연구했다. 브레슬라우에서 처음 논리적 근거를 갖춘 평지붕은 프랑크푸르트 정착지에서 본격적으로 활용된다. 평지붕은 지붕구조를 짜기 위한 숙련공이 필요 없었고, 이는 비용의 절약을 기대할 수 있는 요소였다. 다락을 만들지 않고 옥상정원을 활용할 수 있다는 논리(Le Corbusier, 1927)는 자금지원이 줄어들면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마이는 평지붕에 이어 조립식 건축시스템을 시도했다. 실험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가구식구조로, 골조 기둥에 슬롯 구멍을 내고 여기에 패널을 끼우는 방식이다. 나머지 하나는 내력벽(Massivbau)시스템이다. 가구식 골조시스템은 콘크리트 패널(1.1 m×3 m×0.2 m)과 베이 폭만큼의 조립된 창문과 조립된 문이 슬롯구멍이 뚫린 기둥과 보에 결합하는 방식이었다. 패널 방식은 패널의 방향에 따라 다른 구성이 가능했다. 가로로 길게 놓였을 때 패널 하나는 한 세트의 창문 하단을 구성했다. 패널 세 개가 세로로 세워지면 창문이 없는 한 베이를 꽉 채우는 벽체가 형성되었다. 골조가 9미터 간격까지 가능했으므로 내부에는 보나 기둥이 없어도 건축이 가능했다. 마이는 조립식 건축 시스템이 튼튼하고 심지어 별도의 외장마감 없이도 건축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무엇보다도 공기단축이 큰 장점이었다. 대형 프리캐스트 콘크리트부재를 활용하면서 이틀에 하나 꼴로 주거 유닛을 건설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슬래브는 매우 강해서 3층 구조물을 기둥 없이 지지할 수 있었다(Mullin, 1977). 패널을 생산하기 위한 공장이 주거단지가 들어서는 부지 안에 설치되면서 운송비용과 시간도 절약할 수 있었고(Schürmeyer, 1927), 마이는 인건비가 감소하는 겨울 비수기를 이용하여 실업자를 비롯한 비숙련공을 활용하였다.17) 프라운하임1에서 10채의 주호에서 실험적으로 진행된 조립식 주택은 프라운하임의 나머지 건축물과 베스트하우젠에서 각각 400여 채씩, 도합 1000여개주호에 전면적으로 적용되었다.
에른스트 마이와 신 프랑크푸르트 주거단지에서 합리성 추구는 동시대 건축가들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전통과 토착 건축, 맥락에 대한 존중이 선행되고, 거주자를 근대적 시민으로 육성하고 보다 양호한 주거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위생의 개념을 확장하여 적용하고 있다. 표준화와 대량생산을 통해 경제성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합리적 계획과 경제적 건설 집행을 동일시하는 데에서 비롯한 내부적 모순을 충분히 인지하지는 못했다.
V. 결 론
본 연구는 에른스트 마이가 노동자계층에 가졌던 인식이 신 프랑크푸르트 주거단지에서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규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문헌과 계획내용을 비교분석하는 방식으로 고찰을 시도하였다. 이를 통해 도출된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에른스트 마이의 노동자계층에 대한 인식은 프랑크푸르트의 주거단지에 방향과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그에게 노동자계층은 철저히 타자이다. 에른스트 마이는 노동자를 분석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자신과 같은 행정적 역량과 계획적 능력을 경비한 이들에 의해 제공될 ‘새로운 생활’을 체험하면서 수동적으로 훈육되는 대상으로 이해했다. 그는 계획의 합리성과 실행의 경제성을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경제성 구현에 따라 노동자계층에 대해 양립하기 어려운 태도를 취했다. 이로 인해 에른스트 마이는 엘리트 관료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와 사민 주의적 태도 모두를 드러낸다.
이러한 복합적이고 대립적인 인식은 주거단지 계획 에서도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마이와 그의 동료들은 도그마가 아닌 실용성의 차원에서 합리성을 추구했다. 프랑크푸르트 주거단지에서 급진적인 성격이 동시대 건축보다 덜한 것은 바로 이런 태도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의 주거단지계획은 계획에서 주거에 이르는 건축의 모든 단계와, 전 참여주체에 걸쳐 노동자 계급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합리성을 치열하게 추구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합리성을 구현하는 실행논리로 경제성과 기능성을 내세우면서 나타나는 독특한 해석 방식의 측면에서 평가되었을 때,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