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 론
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1) 연구의 배경
한반도에 불교가 최초로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인 소수림왕(372년)시기의 고구려이며, 백제는 침류왕(384년)때에 마라난타에 의해서이다. 또한 신라에는 법흥왕(527년)때에 불교가 공인되었다. 불교는 처음 유입될 때부터 다양한 불교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종파가 생겨났고, 전국에는 종파별로 많은 사찰들이 창건되었다. 그리고 그 모습과 형태는, 역사가 흐르고 전란과 정치적 상황에서도 그 명맥을 유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중 충청도 부여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범일국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만수산 무량사가 있는데, 극락세계의 주존인 아미타삼존불을 모신 중층불전의 극락전과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5층석탑, 석등, 당간 등 유구와 여러 전각들이 있어 백제계 사찰로써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 미타계 사찰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사역 중간을 흐르는 계류 동측에는 발굴조사를 통해 와편, 와적층, 건물지 심초석 등이 발견되어 창건 당시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확인된 무량사구지가 있어 옛 사찰의 규모를 짐작케 하고 있다. 정토(미타)신앙은 삼국시대에 이미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중국이나 일본처럼 종파를 만들어내지는 못하였으나 타 신앙과의 융화를 통해 현재까지 모든 불교 종파에서 미타신앙의 염불을 의례와 기도에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주 연구대상 사찰인 무량사는 전국의 대부분의 미타계 사찰과 달리 정유재란 이전까지 계류를 중심으로 사역이 좌, 우 즉, 동과 서로 나뉘어져 사역이 조성되어져 있었음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어 충청도 미타계 사찰의 특성을 나타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있어야할 것입니다.
2) 연구의 목적
전국에는 극락정토신앙의 주불전인 극락전과 주존인 아미타불을 봉안한 미타계 사찰이 있으며 사찰의 근본인 극락정토신앙은 정토삼부경을 기반으로 한다. 이 정토삼부경의 근본은 극락정토에 인간이 태어나기 위해 어떠한 발심과 수행을 실천해야 하는가를 밝히고 있으며, 무량사를 비롯한 많은 미타계 사찰에서 사찰조영을 통해 극락세계를 이 땅에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번 연구를 통해 이를 어떻게 사역에 구현했는지 여부와 시대변화 속에서 금당과 탑의 배치형태와 변화된 모습을 전국의 미타계 사찰을 통해 확인하고, 특히 부여 무량사는<Figure 1>1)과 같이 사찰 내에 있는 중층불전의 극락전을 비롯한 여러 불전들과 5층석탑, 석등, 당간 등, 유구들을 조사하고, 계류 동측에 위치한 무량사구지와 서측의 극락전 영역의 사역조성 변화를 연구하여 충청도 미타계 사찰의 특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2. 연구의 방법 및 범위
1) 연구의 방법
극락정토사상의 교리해석을 바탕으로 <Figure 3>와 <Table 1>과 같이 연구대상 사찰의 연혁을 창건, 중창, 재건, 중수과정으로 구분하여 고문헌, 비문, 발굴조사보고서를 통해 확인하고. 현장답사와 현지 사승들의 인터뷰를 통해 시대별 많은 변화가 있으면서도 사찰의 품격을 유지하고 있는 각 사찰의 특성을 찾고, 특히 배치의 변화과정을 중점적으로 확인하며 <Figure 2> 연구의 흐름도의 순서를 통해 방향을 찾아 진행하고자한다.
Table 1.
Temple list
II. 정토(淨土)신앙과 미타(彌陀)계 사찰의 성립 과정
1. 정토신앙(淨土信仰)
1) 불교(佛敎)의 전래(傳來)와 정토신앙의 내용(內容)
인도의 북부 카필라왕국에서 태어난 석가모니의 깨달음과 전도로 시작한 불교는 서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래되었고 372년(소수림왕2년) 중국의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고구려에 보냈으며 375년(소수림왕5년) 최초의 사찰인 이불란사와 초문사가 건립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건축이다. 백제는 384년(침류왕원년)서역출신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해주었고, 신라는 528년(법흥왕15년)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의 건립과 함께 시작되었다.2)
정토신앙의 바탕은 불교경전인 정토삼부경이다. 정토삼부경은 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이 세 경전을 일컫는 말로써 극락세계의 주존인 아미타불의 말씀을 설한 경전이며 아미타불을 관하고 극락세계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경전이다 우리나라의 정토신앙은 신라시대 이미 유입되었는데, Choe(2012)는 신라시대 “선덕왕 때에 자장이「아미타경소의」와「아미타경류」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3)고 하였으며, 고려시대 지눌은 “선종과 타력신앙의 형태인 정토신앙에 있어 선수행과 정토신앙이 다르지 않은 선정일여를 추구했다.”고 하였다.
Mok(2020)은 원효스님의 “정토관련 저서로는「무량수경종요」,「아미타경소」에다 내용을 추가한「유심안락도」가 있다.”4)고 하였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미타신앙은 이어졌는데, 교학 불교는 화엄학으로, 선불교는 선수행으로, 정토에 가고자 타력신앙인 미타신앙은 염불신앙으로 현재까지 전승되어오고 있으며 우리의 불교 의례와 전통이 이를 따르고 있다.
2. 미타계(彌陀係) 사찰(寺刹)
1) 전국의 미타계 사찰
미타계 사찰의 배치특성으로. Kim(1988)은 “미타계 사찰은 핵심교리인 정토사상에 충실해 엄격한 제 영역의 독자성을 추구했고”5)라고 했으며, 구성형식 계통도의 배치분석을 통해 단일신앙의 단일영역형과 복합신앙의 양원병치형 그리고 통불교화 이후에 교축형과 분원형으로 분류한 바 있다. Kim(1988)의 연구 이전에 학계에서 사찰의 분류방법을 보면 전통사찰과 기존사지의 배치를 분석하여탑을 중심으로 형식을 분류한바 있는데 고구려의 일탑삼금당식, 백제의 일탑일금당식, 통일신라의 이탑일금당식과 무탑식으로 분류하였다. 탑이 중요시되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와 달리 탑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선종이 주류였던 조선시대를 연구대상으로 삼았으나 31개의 연구대상 사찰 중 26개 사찰이 조선시대 이전에 창건되고 탑의 건립이 된 것으로 확인되었고 5개 연구대상 사찰에서만 조선시대 창건이 되어 이를 별도로 분류하지 않고 연구하였다.
또한 사찰의 입지에서 전체31개의 연구대상 사찰 중 백제계 지역인 전라도와 충청도지역의 사찰이 13곳인데 이중 백제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평지형 사찰은 2개 사찰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산지형 사찰이다.
옛 신라지역인 경상도지역 사찰은 13곳인데 모두가 산지형 사찰이며, 서울. 경기, 강원지역 사찰은 4곳인데 산지형과 구릉지형이 각각2곳씩으로 확인되었다.
연구에 있어 위와 같이 대부분 산지형 사찰로 시대별 가람의 입지를 구분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어 이를 연구에 반영하지 않기로 하였다. 대부분이 산지형 사찰로 있는 것은 조선시대 평지형 사찰이 폐사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유추된다.
이번 연구는 <Table 2>과 같이 전국의 미타계 사찰을 영역과, 축, 탑제, 극락세계로 가기 전 심판을 받기 위해 거쳐야 하는 지장보살과 명부시왕이 있는 명부전의 존재 유. 무와, 주불전을 기준으로 한 명부전의 위치, 극락세계로 태어나기 위한 16가지 관법 중 보지(寶池)관 보루(寶樓)관이 사역에 구현 되었는가를 조사하였다. 이를 통해 구성형식을 <Table 3>과 같이 중축형, 병렬형, 교축형, 다축형으로 재분류하여 <Table 4>과 같은 분석 결과가 도출되었다.
Table 2.
Research target temple placement analysis table
Table 3.
Classification table of composition type
Table 4.
Research target temple placement analysis table
| Temple name | Area | Axis | Pagodas | 16 Gwanbeop (Yes,No) | Myeongbujeon | Note | |
|---|---|---|---|---|---|---|---|
| Bojigwan (Water) | Borugwan | ||||||
| Bulguksa Temple | Multi area | Multi axis | Twin pagodas | Mountain stream | |||
첫째 영역을 분석해보면 <Figure 4>과 같이 연구대상 31개 사찰 중 단일영역형이 21개 사찰로 67.74%이며, 양원영역형이 8개사찰인 25.80%이고, 다불전 영역형이 2개 사찰로 6.45%이다.
둘째 축을 분석해보면 <Figure 5>과 같이 연구대상 사찰 총 31개 중 중축형이 20개 사찰로 64.62%이고, 병렬축이 8개사찰로 25.81%이며, 교축형이 3개 사찰로 9.67%이다.
셋째 연구대상 <Figure 6>과 같이 사찰 총 31개 중 전라, 충청, 서울 등 백제계 지역은 총16개 사찰 중 12개 사찰인 75%가 중축형인데, 강원 경상도 등 신라계 지역은 총15개 사찰 중 7개 사찰인 46.67%인 만 중축형으로 나타났다.
넷째 명부전(지장보살: 중생의 극락왕생을 서원한 보살이며, 아미타불의 우보처로 표현되기도 한다.)을 살펴보면 <Figure 7>과 같이 연구대상 사찰 총31개 중 17개 사찰인54.84%가 명부전 또는 지장전이 있으며, 이중 11개 사찰인 64.71%가 명부전이 주불전 우측에 있고, 6개 사찰인35.29%가 주불전 좌측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섯째 탑을 살펴보면 <Figure 8>과 같이 연구대상 사찰 총 31개 중 24개 사찰인 77.42%가 탑이 있으며, 이 24개 사찰 중 12개 사찰인 50.0%에서 탑이 불전 중앙 즉 중축(重軸)에 위치하여 단탑 형식으로 있다.
여섯째 관무량수경 16관법의 내용 중 보지(寶池)관(연지 또는 계류), 보루(寶樓)관(루각)은 연구대상 <Figure 9>과 같이 사찰 총 31개 중 25개 사찰인 80.65%에서 연지 또는 계류가 있다.
일곱 번째 연구대상 <Figure 10>과 같이 사찰 총 31개 중 19개 사찰인 61.29%에서 누각이 사찰 전면부에 건립되어있다.
이번 연구 분석을 통해 탑과 관련하여 Kim(1989)은 “아미타불은 열반에 들지 않고 온 법계에 충만하므로 경탑을 두지 않는다.6)”라는 원륭국사비의 내용을 인용하였으나 위 분석결과로 보면 31개중 24개로 77.42%의 사찰에 탑이 있다.
탑이 현존하는 24개의 사찰 탑을 세분화하면 금탑사, 백양사, 용문사 3개(12.5%) 사찰의 탑은 1920년 이후에 건립된 탑이며, 흥천사, 보덕사 2개(8.33.%) 사찰의 탑은 1800년 말에 건립된 탑인데 이 두 탑은 축과 무관하게 위치하여 중심성을 갖지 않고 있다.
불국사, 부석사, 고운사, 동화사 금당암, 실상사, 여주 신륵사 6개(25.0%) 사찰의 탑은 신라시대의 탑이고, 나머지13곳(53.17%)는 고려시대 탑으로 확인되었다.
신라시대 조성된 탑 중에도 부석사 탑은 금당 정면이 아닌 금당 측면에 위치하고 있어 특이점을 나타내고는 있으나 금당안의 아미타불이 금당 우측에 위치하여 좌향을 하고 있는데 바라보는 곳에 탑이 있어 어느 정도 변형된 축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 연구대상으로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이전 건립된 탑이24곳 중 19곳이다.
탑은 무너져도 재건 역이 쉽고 주불전 앞 축선 상에 탑이 위치했다면 재건역 과정에서 일부러 탑의 위치를 변화시켜 위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연구 사찰인 미타계 사찰에서 과반의 탑이 불전의 중앙에 위치하여 화엄계 사찰의 중심성을 갖는다는 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음을 일부 확인하였다.
각종 전란이나 화재로 사역이 파괴되는 경우, 사역의 전체가 전란으로 소실되는 경우는 그로 인해 사찰의 중심영역인 금당과 탑의 위치나 규모가 변화되는 경우가 있다, 전체 사역이 소실되지 않고 일부 불전이 소실되는 경우에는 화재 이전에 존재했던 기단과 초석을 복원하여 그대로 사용하고 상부 기둥과 지붕 부를 재건하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번 연구 대상 사찰 중 전체 사역의 위치가 변경된 경우는 확인되지 않아 금당과 탑의 위치 변화를 일괄 분석하였다.
2) 충청도(忠淸道) 지역
(1) 무량사의 정토 신앙(信仰)
무량사의 사명은 창건 시부터 현재의 사명을 유지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무량이라는 용어 자체가 부처님의 공덕은 영원하다는 의미로 결국 영원한 극락세계의 주존 아미타불을 상징하는 사명으로 이는 무량사가 창건 당시부터 정토신앙을 바탕으로 미타계 사찰로 창건되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또한 계류인 만수천을 중심으로 현재 탑과 불전이 계류 서측에 서방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극락전 영역이 <Figur 11>과 같이 극락전을 중심으로 있다면, 계류 우측으로는 옛 절터인 무량사구지가 유구를 간직한 채 터로만 남아있다.
『무량사약지』(1961년)의 기록에 의하면 360여 년전 천불전과 대웅전이 소실되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았을 때, 현사역 동측의 무량사구지에는 사바세계에 오신 석가모니불을 상징하는 대웅전 영역이 조선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 사역이 존재했을 것이다. 즉 무량사는 사바세계와 극락세계를 계류를 기준으로 동과 서측에 함께 구현하고자 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III. 무량사의 연혁과 가람(伽藍)배치(配置)의 변천 과정
1. 무량사의 연혁
무량사에 대한 고문헌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나『무량사중수기』(1915년)과『무량사내극락전중수기』(1931년) 그리고 『무량사약지』(1961년)을 비롯한 여러 사료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범일국사에 의해 창건되고, 헌강왕(880-888년) 때 무염 국사가 중수하였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수가 이루어졌다는 근대기의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 세조 10년(1464년) 매월당 김시습이 전국의 사찰로 떠돌다가 무량사에 와서 극락전을 비롯한 무량사 불전들을 중수하고 극락전 현판의 글을 직접 썼다고 한다.7)
정유재란 시 많은 불전들이 소실되었으나 인조11년(1633년)에 극락전이 중건되고 그 안의 소조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었다. 19세기 고종9년(1872) 영산전과 명부전이 건립이 이루어졌으며, 20세기 후반에 우화궁, 영정각, 사천왕문, 일주문이 차례로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신앙체계(信仰體系)의 변화(變化)에 따른 가람배치
1) 신앙형태(信仰形態)의 융화(融和)
무량사라는 사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초 창건의 이념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주존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하는 극락세계를 사찰 조영에 구현하고자 했고, 그 중심에 극락전이 있어 일곽을 구성했을 것이다.
이후 시대의 변천에 따라 계류 동쪽 부지에 타 종파의 불전 영역이 조영되어 신앙의 융화를 꾀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는 현재 사역 동측에 무량사구지라는 이름으로 터만 남아있으나, 2천 년 초에 이루어진 4차례의 무량사구지 발굴 및 유구 조사를 통해 현재의 극락전 규모와 유사한 형태의 금당지를 비롯한 강당지 그리고 여러 건물지가 발굴되어 무량사 동측과 서측에 대규모의 사역이 함께 존재해왔음이 확인되었다.8)
『무량사약지』(1961년)에 천불전과 대웅전이 전란 시 소실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무량사는 창건이후 어느 시기부터 계류를 중심으로 서측의 극락세계와 동측의 사바세계를 함께 구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외에도 시대변천에 따라 타 종파의 신앙이 융화되어 불전이 건립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데, 근대기인 19세기와 20세기말 기간에도 영산전, 명부전, 산신전, 등의 부불전과 천왕문, 일주문이 건립된 것으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즉 미타계를 기본으로 타 종파와의 융화가 함께 이루어졌음이 확인되고 있다.
2) 영역(領域)의 분화(分化)
무량사의 창건은 <Figure 12>과 같이 만수천 서측에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불전 영역을 통해 극락세계를 구현하고자 했으며 이후 계류 동쪽으로 다른 신앙의 영역이 추가로 건립되어 극락세계와 사바세계가 계류를 기준으로 병합된 사역이 조성되어 영역의 분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무량사약지』(1961년)의 기록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를 의미하는 360여년전 천불전과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들이 소실되었다라고 되어있고 현 무량사구지 발굴조사(2000년부터 2007년까지 4차례 조사 실시)에서 신라시대를 비롯한 고려시대 와편과 와적층이 발견되었고 몇 차례의 중건과 중수 흔적이 나왔으며 무량사구지내에서 금당지를 비롯한 강당지가 발견되어 사명인 무량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최초 아미타불을 모신전각인 극락전영역이 조영되었고, 이후 대웅전영역이 추가로 조영되어 계류를 중심으로 서측과 동측에 영역의 분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조 전란으로 불전이 모두 소실된 이후 계류 서측의 극락전 일곽의 극락전은 인조연간에 재건이 되었으나 계류 등측의 현 무량사구지 일곽은 소실된 후 재건되지 못하여 현재는 미타계 사찰로만 남아있으나 무량사구지가 터로 남아있으면서 불전의 유구들을 간직하고 있어 하나의 사역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할 것이다.
3. 탑(塔)에 의한 구심적(求心的) 배치
1) 탑
근세기 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사찰 배치의 분류방법으로 많이 사용된 것이 탑제에 의해 분류하는 방법이었다. 고대 사찰의 분류방법으로 고구려는 1탑 3금당식, 백제는 Lee(2005), <Figure 13>과9) 같이 1탑1금당식(3탑3금당식), 신라는 2탑1금당식, 그리고 동전서탑식과 무탑식으로 나뉘기도 하는데 이런 일반적 분류법과 대비되는 배치분류법으로, 80년대 후반 선행연구에서는 교리해석을 바탕으로 축과 영역, 탑의 존재 유. 무를 기준으로 종파계 사찰을 하나의 분류법으로 발표되었다. 이 연구에서 미타계 사찰의 특징으로 중축형에서는 단일영역에 단일불전 그리고 무탑으로, 양원병치형에서는 양원영역에 2불전 무탑으로 연구결과가 발표된바 있다.

Figure 13.
Baekje temples construction placement map
Source. Baekje temple construction formation and technology
무량사는 계류인 만수천 서측 영역만으로 보면 <Figure 14>과 같이 극락전을 중심으로 고려 초 형식으로 조성된 5층석탑과 석등이 단일 축선 상에 놓여있고, 현재 5층석탑의 1층 기단부중 일부가 지면에 노출되지 않고 땅속에 묻혀있다.
Jeon(2017)은 논문초록에서 “무량사오층석탑의 원형은 일제시대 학자인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스키야마 노부조우(杉山信三)의 기록이 남겨져있으며 이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은 기단이라고 할 수 있다. 학자들의 공통점은 무량사오층석탑의 기단이 2층기단인 것이다.”10)라고 하여 1층 기단으로 해석하는 것과 대조를 보이고 있다. 창건 이후 탑의 위치가 변화된 흔적이 없으며 탑의 재질상 석재로서 극락전이나 다른 불전들처럼 목조가 아니기 때문에 최초 탑의 건립 이후 화재에 소실되지 않고 현존하며 강한 중심성을 유지하고 있어 무량사는 배치상 탑이 구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일탑식 가람(伽藍)배치(配置)의 조영(造營)계획
영주 부석사에 있는 원륭국사비 비문에 아미타불은 아직도 설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열반에 들지 않아 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기존의 선행 연구에서는 미타계 사찰의 특징으로 무탑식으로 밝히고 있으나 이는 일부 사찰에서 나타난 모습이고 무량사를 포함한 많은 미타계 사찰에서 특히 중축형 단일 불전형 사찰에서는 탑이 현재까지 중심 축선상에 남아있고 화엄계 사찰의 탑을 중심으로 강한 중심성을 갖는다는 이론이 미타계에도 일부 인용되어질 수 있다. 주 연구대상인 무량사도 현재 사역만으로 본다면 고려초 백제계형식의 5층 석탑이 그 위용을 충분이 드러내며 사찰의 조영을 만들어 내고 있다.
무량사는 창건 시부터 중축형으로 단일영역 단일불전의 단탑형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무량사가 있는 지역이 옛 백제지역으로 백제계 사찰의 특징이 탑과 금당 강당을 일직선상에 두고 건립되는 것이 인근 부여 정림사지나 익산 미륵사지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이곳 무량사도 이와 마찬가지로 5층 석탑을 중심으로 불전들이 건립되는 동일 백제계의 일탑식 가람배치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IV. 무량사의 배치(配置) 특성(特性) 분석
1. 무량사의 입지(立地) 및 배치(配置) 특성
무량사의 입지를 보면 현재 사역 내 계류인 만수천 서측의 무량사 영역은 산지 아래 평지에 가까운 구릉지로 되어있고 주불전 앞마당은 평지와 다름없어 천왕문에서 주불전인 극락전 앞까지 평탄하며, 옛 사역인 무량사구지 영역은 백제계 사찰 터의 전형인 평지를 이루고 있고 주변 지형의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아 창건 당시부터 평지와 얕은 평지성 구릉지에 사역이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무량사 배치의 특성으로 <Figure 15>와 같이 무량사 사역 내 계류를 사이에 두고 사역이 둘로 나누어진 사찰의 조영 방법은 타지역 미타계 사찰에서도 일부 유사성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2장 전국사찰의 배치 분석도를 통해 예천의 용연사와 의성의 고운사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계류를 중심으로 한쪽 구역은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미타계 구역이, 다른 한쪽은 석가모니불이 현세에 나투신 대웅전을 중심으로 사바세계를 표현한 법화계 구역이 있다. 또한 무량사의 배치의 주요특성으로 백제계 사찰에서 엿볼 수 있는 금당, 단탑, 중문 즉 천왕문으로 이어지는 단일축선의 중심축을 갖는 일탑식 가람배치를 나타내고 있다.
배치특성을 보면 <Figure 16>과 같이 탑제에 의한 사찰의 분류 방법이 백제계 1탑 1금당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선행연구에서 분석된 미타계 사찰에서는 아미타불이 설법을 하고 있기 때문에 탑을 두지 않는다는 비문을 통한 옛 선사의 말씀이 이곳 무량사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배치의 분류 방법임을 확인하였다.

Figure 16.
Muryangsa Temple arrangement and area, axis analysis map
Source. actual survey report quotation
창건 시기인 통일신라시대 말과 고려 시대 초에는 이 영역은 탑과 금당의 일탑식 가람배치로서 사찰 배치의 또 다른 방법으로 해석하면 축은 중축형이고 영역은 단일영역형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말 19세기와 20세기에 부불전이 금당을 중심으로 보조 축을 만들고, 탑을 중심으로 영산전과 명부전이 또 하나의 보조축이 있어 현재는 1개의 주축과 2개의 보조 축을 가지고 있다.
단, 축과 영역을 무량사구지를 포함하여 해석한다면 2개의 큰 축을 갖는 병렬축과 2개의 별도 영역을 갖고 있는 양원 영역 그리고 주불전이 여러 개인 다불전형으로써 조선 전기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근대 기록과 유구를 통해 확인하였다.
V. 결 론
개별 사찰에 따라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각각 창건된 후 오랜 세월 동안 각종 전란과 화재로 소실되어 재건, 중건, 중수를 거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전국의 미타계 사찰과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백제계 사찰 형식이 잘 보존되고 있는 부여 만수산 무량사를 깊이 있게 연구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되었다.
첫째 불교 종파에 있어 창건 당시는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하는 정토사상에 의해 창건되었으나 이후 중건과 재건
과정에서 별도의 영역이 확장되며 타종파와 융화가 이루어진 경우와 현재까지도 미타계 사찰의 구성 형식을 유지하는 경우, 그리고 통불교화 되어 여러 불전이 함께 영역을 구성하는 경우 등 단일종파로 유지되기보다는 시대흐름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둘째 영역에 있어 단일영역을 구성하는 이외에 미타계와 법화계가 함께 병렬형 또는 교축형의 영역을 만들고 있고 이에 비하여 불국사, 실상사 등은 다불전 영역을 구성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셋째 미타계 사찰임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극락세계로 가는 16관 법을 사찰의 조영에 어떻게 표현했을지 여부인데 이 중 다른 관법은 사찰의 조영으로써 나타내기 어려우나 계류나 연못 등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보지관과 사찰 전면의 누각으로 표현될 수 있는 보루관을 핵심으로 파악하였다. 대다수 의 사찰에서 계류 또는 연못 그리고 루를 주불전 전면에 위치시키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넷째 극락세계로 가기 전에 명부시왕의 심판을 받고 간다는 이론에 의해 지장보살과 명부시왕이 모셔져있는 부불전인 명부전(지장전)이 과반의 연구대상 사찰에서 건립되어 있음이 확인되었으며 주불전을 중심으로 좌, 우 방향에 대한 특성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섯째 주 연구 대상인 부여 무량사는 무량이라는 사찰 명호에서 알 수 있듯이 창건 당시부터 미타계 사찰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초 계류를 중심으로 현재 백제계 5층 석탑이 있는 좌측에 극락전 영역이 있었고 계류 우측으로는 타 종파의 불전으로 금당지와 강당지를 비롯한 불전의 초석, 그리고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시대에 이르는 와편, 와적층의 유구가 무량사구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고, 현재도 유구의 존재와 터의 보존을 통해 불전은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부터 조선시대 전반기까지 두 개의 영역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앙체계는 미타신앙의 단일신앙에서 조선시대 전란으로 불전이 소실되기 전까지는 복합신앙으로 되었다가 정유재란으로 무량사구지 영역이 소실되어 다시 단일신앙으로 변경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축 또한 중축형에서 병렬축형으로 확장되었다가 다시 중축형으로 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근대기의 부불전 건립으로 2개의 보조축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영역의 구성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계류를 중심으로 좌측은 극락세계인 미타계, 우측은 사바세계로 법화계 영역으로 조영됐을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번 연구를 통해 밝히지 못한 일부 연구는 이후 보다 상세한 자료수집과 문헌 연구를 통해 추가로 밝혀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