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arch Article

Journal of the Korean Housing Association. 25 August 2022. 65-74
https://doi.org/10.6107/JKHA.2022.33.4.065

ABSTRACT


MAIN

I. 서 론

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주거는 물적인 대상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이 거주하며 인간 삶의 역사를 다룬다.1) 인간의 삶과 주거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거와 그 속에 머무르고 있는 개인의 관계적 파악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것은 미시사의 관점2)을 통해 주거와 개인사 간의 밀접성에 대해 입체적인 분석이 필요함을 의미한다.3) 주거의 공간은 물적인 의미를 넘어 그 안에서 거주하는 인간 삶의 변화에 따라 그 공간이 갖는 기능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에 본 연구는 내부의 시선 다시 말해서 ‘내부인의 관점에서 집을 파악할 때, 인간과 주거와의 관계를 읽어낼 수 있다.’ 라는 전제를 갖는다. 즉, 시간상 현재 보이는 거주 형태를 넘어 과거의 삶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속에서 거주하였던 사람들의 생활을 복원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점에서 현재 거주자를 중심으로 과거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주거의 이용 방법을 파악해 보려고 한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거주자의 관점에서 일상생활의 기억을 추적하여 과거로부터 전해져 온 주거공간의 사용법을 살펴보고, 시대변화에 따른 주거공간의 의미를 인간과 주거와의 관계 속에서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다.

2. 연구대상

본 연구는 전라남도 나주시 남내동에 위치하고 있는 남파고택을 대상으로 한다. 남파고택은 전라남도 근대가옥 가운데 개인주택으로는 비교적 큰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집안의 내력과 함께 시대적 특징이 잘 간직된 20세기 초반의 전남지방을 대표하는 상류 가옥 중의 한 곳이다. 이 가옥은 박씨 일가 중 4대조인 박재규(1857-1931) 시기에 건축(건립시기: 1917년)된 것으로, 현재는 박경중(1947-현재)씨가 이 집의 주인이다. 남파고택은 1987년 6월1일에 나주시 문화재자료 제153호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건축적·민속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민속문화재 제263호로 승격(2009년 12월 17일)되었다.

3. 선행연구

남파고택에 관한 종합적 조사는 2017년 문화재청과 나주시에 의해서 보고되었다.4) 이 보고서는 남파고택의 지역적 특성과 건축물 현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어 남파고택을 연구하기 위한 기초자료로 폭넓게 활용할 수 있다. 종합적 조사 이전인 2009년에 이미 김광언(Kim, 2009)은 이 집의 건축, 생활, 음식, 살림 등 집안의 전반적인 내력에 대해 『박장흥댁』5)이라는 제목으로 민속학적 측면에서 정리하였다. 한편, 남파고택에 관한 건축학·민속학 입장이 아닌, 인문·과학 연구(Kim, 2003)6)와 (Park, 2003)7)도 주목된다. 이들 연구는 주로 일제치하의 농업경영과 향리가문의 동향을 다루고 있으며, 당시 박씨일가의 농업경영과 시대상을 엿 볼 수 있다.

이상을 개관한 남파고택에 관한 연구는 건물의 규모나 특징, 계획 등을 기술한 보고서, 또는 집안의 내력이나 생활상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본 연구와 깊은 관련이 있으나 주로 민속학적으로 접근하여 거주자의 생활상에 대해서만 논의되고 있을 뿐, 선대의 최초 거주자부터 현재의 거주자가 이용하였던 주거공간의 의미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외에도 인문·과학연구에서는 당시 거주자의 농업과 가문에 대해서만 논의되어왔다.

이에 본 연구는 고택을 중심으로 거주자의 일상생활의 관점에서 거주자가 주거공간을 어떻게 이용하였는지 살펴보고 거기에서 나타난 주거공간의 의미를 밝히는 것으로서 기존 연구와는 다른 시점을 제공한다.

4. 연구의 범위 및 방법

과거의 주거생활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기록이 유용하지만, 기록물이 없는 주택에서는 거주자의 증언이 기록물을 대처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Kim, 2016). 현재 남파고택의 거주자 중 가장 연장자는 박경중(만75세)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1947년에 출생한 인물로 남파고택이 건립된 1917년도의 생활은 알 수 없으나 그의 어머니와 조부·모로부터 전해 들은 선대들의 행적, 성격, 생활사 등 남파고택에서의 주거생활사에 대해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구전으로 전해 들은 선대들의 생활사지만,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본 연구의 범위는 남파고택이 건립된 1917년부터 오늘날까지 박경중씨가 증언한 선대들의 주거공간 사용법을 살펴본다.

연구의 방법에 있어서는 현거주자(박경중)8)를 대상으로 구전과 면담방식을 채택하여 연구를 진행한다. 거주자의 구술을 통해 주거공간 안에서 생활하였던 인간의 삶과 주거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거와 그 속에 머무르고 있는 개인의 관계적 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Oh, 2022). 개인의 관계적 파악은 주거와 개인사 간의 밀접성에 대해 입체적인 분석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주거공간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의 의미를 넘어 그 공간에서 거주하는 인간과의 관계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가능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9) 한 주거공간에서 대대로 정주해온 선대와 개인의 주거경험을 통해 주거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연구방법론이 있겠으나 본 연구에서는 구술사와 인터뷰 방식을 통해 진행하도록 한다. 구술생애사는 개인의 경험과 기억에 있는 삶의 내용을 구술로 재현, 증언하고 그 구술자료를 해석하여 역사로 활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Chi, 2014). 또한, 구술생애사는 한 사람의 삶의 표현이자 개인의 역사 자료이며 또한 가족과 사회에서의 한 개인의 위치를 지극히 주관이 개입된 해석을 통해 재구성하는 작업이다(Lee, 2011). 개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당시의 일상사와 생활사, 그리고 그 공간구조의 해석을 통해 인간은 다양한 주거사를 인식할 수 있다. 이처럼 한 개인의 삶은 단순한 개인의 삶에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혹은 그가 경험한 그 시대의 사회와 뗄 수 없는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인간과 거주와의 관계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박경중씨의 증언과 구전을 통한 구술사적방법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구술자의 심층면담10)은 거주자의 생활에 대한 전반적인 질문으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연구자는 구전으로 전해져온 선대들의 생활사에 대한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3주에 걸쳐서 같은 질문을 반복적으로 하여 정확도 검증을 하였다. 이외에도 거주자로 하여금 각 공간에 대한 명칭과 공간에 대한 의식, 기거장소, 식사, 부엌 일 등과 같은 일상생활과 제사나 제례 등과 같은 비일상생활 그리고 민간신앙 등을 구분 지어 질문하고 거주자의 주거공간 사용법과 인식을 파악하였다. 이를 종합하여 남파고택의 주거 사용법을 밝히고 그 의미를 결론에서 정리한다.

II. 남파고택

1. 입지 및 입향조

나주시 남내동 금성길13에 위치한 남파고택은 나주읍성의 남문이었던 남고문에서 약 180 m 떨어진 북서측에 자리하고 있다. 동측으로는 남산이 있고 서측으로는 금성산과 한수제가 있으며, 이곳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끼고 있다. 특히, 이 물줄기가 고택의 서쪽에서 ㄱ자로 꺾여 풍수상 길한 자리라고 박씨일가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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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The Governor of Jang-Heung and Gok-Seong, Appointment Certificate

Source. Nampa old house

남파고택은 박경중씨의 고조부인 박재규라는 인물에 의해서 건축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6대조인 박승희가 초당채에 살았다고 하였고, 집 안채(남파고택)를 짓기 전 1917년도까지 기와집이 있었으나 이 집을 허물고 박재규가 지금의 기와집을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특히 박경중씨의 증언에 의하면 장흥군수를 지낸 고조부(박재규)가 장흥 관아 건물을 본 떠 지었다고 전하며, 이 때문에 ‘박장흥댁’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Kim, 2009).

2. 남파고택의 인물과 가계

남파고택이 자리한 최초의 터를 잡은 인물은 박경중씨의 6대조인 박승희라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박승희는 나주 왕곡 공산면에서 나주 읍성내로 왔으며, 그의 아들 박성호 역시 부친을 따라 1872년에 나주 읍성내로 들어왔다(Kim, 2003). 당시 나주 읍성내에는 기와집이라 불리는 집이 3채뿐이었으며, 그 중 한 곳이 현재 터의 집이다.

“나주읍성내 관청 빼고 개인집으로서 기와집이 3채뿐이 없더라고 이야기를 들었죠. <중략> 남문 안 기와집 그러면 사람들이 우리집으로 데려다 줘. 그 다음에 서문안에 있고, 또 북문 안에 있고, 성 안이야. 성 밖은 빼놓고 이렇게 세 채뿐이었죠. 그래서 우리집 별칭이 남문 안 기와집이었다.” (박경중 2021.04.07.)

남문안 기와집은 4대조이자 고조부인 박재규에 의해서 철거되고 1917년에 현재의 안채가 들어서게 된다. 현재의 가옥을 건립한 박재규는 동학농민전쟁 때 나주를 지킨 공으로 태실의 참봉으로 임명되는 등 1897년부터 1907년까지 10년 동안 궁내부주사를 지냈다.11) 이어서 1908년과 1910년에 각각 장흥 및 곡성군수에 임명된다.

한편, 그의 아들인 박정업은 교육기관 설립에 힘을 기울인 인물로 기억된다. 1922년 5월 금명학원(현재: 예수재림교회)12) 설립을 위해 나주 유지 가운데 제일 많은 출연금을 기탁하는 등 교육을 받지 못한 아동을 위해 평생을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런 대지주였던 박정업은 사업가 이기성의 빚보증에 의해 나주 제2의 대지주가 중소지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그 충격과 화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고 전하고 있다. 박경중씨의 조부인 박준삼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서 나주 민립중학교(청운야간중학교와 나주한별고등공립학교 전신)를 설립하는 등 그의 아버지를 본받아 교육계에 몸을 담고 평생을 보내게 된다. 끝으로 아버지인 박승근은 1930년대 서울중앙중학교를 다녔으며, 1940년 무렵 광주에서 제재소를 운영하였으나 지속적으로 운영하지 못하고, 1958년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된다. 이상 박씨일가의 고택관련 인물과 가계를 정리하면 <Table 1>과 같다.

Table 1.

People and Family Line Related to Nampa Old Houses

GenerationNameTime of LiveContentNote
6th GenerationPark Seung-Hee1814-18951872 Year, Moved to the site in Naju (Chodang-chae)
5th GenerationPark Seong-Ho1838-18861872 Year, Moved to the site in Naju (Chodang-chae)
400Bushels Rich farmer (Selling rice)
Great-great-grandfatherPark Jae-Kyu1857-1931Nom de plume (Nampa) 參奉 (Chambong), Jang-Heung (1908) and
Gok-Seong governor (1910), building a Nampa old House
Great-grandfatherPark Jung-Up1884-1936Established Geummyeong Academy
GrandfatherPark Jun-Sam1898-1976The Active for the Independence, Naju Minrip Middle School established
FatherPark Seung-keun1922-1958Work in agriculture, Sawmill management
himselfPark Kyung-Jung1947-The eldest grandson of the head family

3. 가옥의 변화

남파고택은 일본이 1914년 무렵, 당시의 ‘부동산 등기법 제105조 제11호에 따른 토지조사령 제15조’13)를 바탕으로 작성된 측량도를 통해 최초의 형태를 알 수 있다.

이 측량도는 건물구성이나 형태가 현재와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남파고택의 본래의 모습을 추적해 볼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측량도 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기(己)는 위치상 초당으로 보인다. 갑(甲)은 현 안채를 짓기 전의 원래 있었던 구 안채, 을(乙)은 1957년 경에 허물었다는 안사랑채로 추정되며, 병(丙)과 나머지 건물에 대해서는 현재의 바깥사랑채가 자리한 위치 정도만 확인될 뿐,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따라서 본 측량도에서 알 수 있는 남파고택의 최초의 건물은 초당채, 구 안채, 안사랑채라는 것이 확인된다<Figur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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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2.

Survey Drawing

Source. Nampa old house

한편, 박재규는 1917년에 기존 구 안채를 허물고 새 안채14)와 아래채15)를 짓게 된다. 이후, 1932년과 1935년에 박정업은 바깥사랑채16)와 문간채,17) 대문채 그리고 곳간채18)를 신축하고, 1957년에 박준삼은 마당이 좁다는 이유로 기존의 안사랑채를 철거한 후, 그 재목으로 헛간채19)를 짓게 된다. 이처럼 남파고택은 총 7차례의 크고 작은 신축과 철거가 반복되며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Table 2>와 같다.

Table 2.

Changes of Buildings in Nampa Old Houses

No.ContentYearRelated IndividualDemolish Construct
1stChodang-chae, Old an-chae, An-sarang-chae1884Park Seung-HeeConstruct
2ndOld an-chae1917Park Jae-KyuDemolish
3rdAn-chae (Main-chae), Arae-chae1917Construct
4thOut side-Sarang-chae, Mungan-chae, Daemun-chae1932Park Jung-UpConstruct
5thGotgan-chae1935Construct
6thIn side-sarang-chae1957Park Jun-SamDemolish
7thHutgan-chae1957Construct

4. 현재 남파고택의 배치와 규모

남파고택은 고저차가 거의 없는 평탄한 곳에 자리하였고, 안채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초당, 서쪽에는 아래채, 남쪽으로는 바깥사랑채가 배치되어 안채를 감싸는 듯하다. 부속채로는 아래채, 곳간채, 헛간채, 안뒷간, 문간채가 배치되어있다. 전체공간은 크게 진입영역, 사랑채영역, 안채영역 3개로 구분된다. 진입영역은 대문채와 대문채 안쪽의 문간채 주변으로 대지의 남동쪽 모서리 공간이며 대문채는 남향, 문간채는 서향이다. 사랑채영역은 바깥사랑채 한 동과 화장실이 있다. 안채영역은 안채가 대지의 중앙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안채 북쪽에는 초당채, 죄측으로는 헛간채, 남서쪽으로 아래채가 있다.

특히, 안채는 정면 7칸반(큰방 2칸, 작은방 1칸, 대청 2칸, 나머지는 부엌과 광,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음), 측면 2칸에 전퇴, 후퇴, 우측퇴가 있는 ㅡ자형 평면이다. 좌측의 부엌칸을 제외하고 툇마루가 설치되어 앞뒤로 통하며 전퇴·방·후퇴순으로 동선이 연결된다. 전체 면적이 약 160m2로 전라남도에서 단일 건물로는 비교적 큰 규모이다.

한편, 안채의 전면에는 안사랑채가 있었으나 마당 공간이 협소해 헐었으며, 현재는 마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여 기존 선행 보고서의 도면과 박경중씨의 증언(실 명칭·위치 등) 그리고 현장 실측을 병행하여 현재의 남파고택의 배치평면도<Figure 3>를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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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3.

Site Plan of Nampa Traditional House

Note. This plan was made based on the 『A Report of Korean Traditional Houses, Naju Nampa old house No.263.』 issued by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and Naju City. This plan was completed by this researcher through the interview of Park Kyung-jung and field measurements over a total of three times (2021. 04).

III. 거주자의 생활과 주거공간

1. 기거장소

조선 중기 이후의 주거에서 안채(본채)는 주로 여성이 사용하되 평소의 거처자는 여성 중 상위자와 어린 자녀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혈연적으로 위계가 높거나 실질적 지위를 행사하는 여성과 취학 전후의 연령으로 보호가 필요한 자녀가 사용하는 공간이자 장소였다. 즉, 전통주택에서 안채는 여성, 사랑채나 바깥채는 남성이라는 성별에 따라 공간과 장소가 구분되었다. 그렇다면, 근대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쳐온 남파고택의 역대 가장들은 자신들의 기거처로서 어디를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살펴보았다.

“고조할아버지는 자기가 1917년에 안채를 그 본채를 짓고, 거기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다. 옛날에는 본채나 안채는 본래 여자공간이다. 여자들이 살아야 되 안집이야 그래서 안집. <중략> 20년 가까이 사셨다. 그리고 다 돌아가시고 광복 이후에 정식으로 우리 할머니(손자며느리, 박준삼의 아내)가 들어가 사셨다. 그리고 아버지랑 나는 작은방에 살았고, 우리 할아버지(박준삼)는 따로 안사랑채에 사시다 바깥사랑채로 옮겼다.” (박경중 2021.04.07.)

위의 증언으로 보아 남파고택에서 안채는 박재규와 박정업이 사용하였으며, 박준삼의 시기(광복이후)에 여성이 들어와 기거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박재규, 박정업, 박준삼의 시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그들의 시기는 각각 일본통치기와 해방기(1945년)로 구분되는 시기라는 점에서 안채와 사랑채의 기거 장소가 다르다는 점이 확인된다. 실제 박재규는 혼란했던 사회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는가 하면,20) 박정업은 당시 나주의 대지주임에도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태극기를 마련하여 남의 눈에 안 띄는 벽장 벽에 걸어 두기도 하였을 정도로21) 일본통치기 불안정한 사회로부터 자신의 안위를 보호하였으며, 그 기거장소로서 안채를 택한 것이다. 한편, 광복이후 박준삼은 안채를 여성에게 내어줌으로써 사랑채에서 기거하게 되며, 조선 후기의 성별에 따른 기거장소를 따르게 된다. 이상 그들의 각각의 시기는 사회정세에 따른 기거장소의 변화라는 점이 포착되며, 이를 종합해 볼 때 사랑채는 사회와 연결되는 곳을 의미한다. 일본통치기 박재규와 박정업은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안채에서 기거한 것이며, 박준삼은 해방 후(사회안정) 비로서 본래의 기거 장소(사랑채)로 돌아온 것이다. 또한, 이들 시기에 이미 사랑채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으로부터도 사랑채 부재에 의한 안채점유가 아닌 사회정세에 따라 안채가 점유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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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4.

Nampa Old Houses An-Chae View

Source. The Federation of Korean Cultural Centers

한편, 박경중씨가 남파고택의 주인이 된 시점부터(1976년)는 안채와 사랑채에 대한 주거공간은 남녀의 공간구분이나 사회적 참여에 대한 의미는 사라지고, 시대의 변화와 생활의 편리함으로 변해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나는 안채에서 살았다. 시대가 변하였다. 왔다 갔다 하는 것도 힘들더라. 그래서 사랑채는 그냥 두고 안채로 들어갔다. 대부분의 생활은 이제 안채에서 한다.” (박경중 2021.04.14.)

남파고택에서 안채와 사랑채는 구성원의 기거장소에 따라 사회적 관계를 의미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시대 변화에 따라 그 공간이 주는 의미와 더불어, 점차 생활의 편리함을 중요시하는 장소로 변해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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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5.

Changes of Living Places and Buildings

2. 안채와 안사랑채의 관계, 그리고 거주자

박재규 시대에 안채와 사랑채는 기거 장소에 따라 사회적 의미를 갖는 장소였다. 특히, 안채를 자신의 거처로 활용한 그의 안채 출입법에 대해서 특징이 발견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박경중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안사랑채에서 항상 우리 증조(박정업)가 거기(안채)를 지키고 있다. 대문 막 들어오면 사랑채가 있는데 이게 안사랑채다. 본집은 작은집이고, 생활은 여기서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를 항상 보호하고 있다. 뭘 하든지 간에 여기를 거쳐 가야만 한다. 여기를 거쳐야 안으로 들어가는 거다. 그리 안하면 안채에 못 들어간다. 장흥하고 곡성에서 군수를 하였으니까 이 집도 안채를 그런 내 자리인 마냥 집도 크게 지었고, 자기가 근무했던 거 생각하고….” (박경중 2021.04.07.)

박경중씨의 증언 내용으로 보아 당시 안채 출입을 위해서는 중요건물의 출입 절차를 밟는 수순으로 진행되는 듯하다. 박재규는 자신의 거주지는 과거 동헌과 연결되는 곳이며, 그렇기 때문에 주거내의 출입을 엄격한 통제속에서 유지해 온 것이다. 바꿔 말하면, 안채는 사랑채 역할을 대신한 곳으로써 그에 있어서 사회와 연결되는 곳을 의미하며, 그곳에서의 기거는 관직생활의 당시를 떠오르게 하는 장소였다. 한편, 다른 의미로서 당시에는 젊은 사람이 나이든 노인을 받들어야 했으며, 이런 연유로 안사랑채를 지나야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치안이 불안했던 구한말에 아들이 안사랑채를 지키며 부친의 신변을 보호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안채는 대외적으로 사회 정세로부터 신변 보호를 위한 장소로서의 의미를 가지며, 박재규와 박정업에 있어서는 안채에 사랑채의 기능을 부여하여 가장의 기거장소로 이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식사장소

식생활은 주거생활 중 취침과 더블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22) 특히, 조선시대의 식생활 문화는 상하, 남녀구분이라는 이분법적 유교적 원리를 개념으로 이해해 왔다.23) 하지만, 근대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러 생활양식이 변화하면서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하는 양식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양식의 변화 속에서 남파고택 박씨일가의 식생활 문화를 살펴보려고 한다. 조선시대와 현대의 중간시점인 근대기의 식생활로서 특히,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의 우리의 식사문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남파고택의 식사 모습에 있어서 박경중씨는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남파가 안채에 사시는 동안에 여기 있는 손자들이 아침 문안 인사 겸해서 아침밥은 여기서 먹었다. 자기들 집에 부엌이 있어도 다 이리로 왔었다고 한다. 남파가 있으셨기 때문에 아들 손자들이 오는 거다.” (박경중 2021.04.07.)

당시 여성들은 어디서 식사하셨습니까?라는 추가 질문에 “여자들은 안채에 못 들어오고 부엌이나 초당채에서 먹었다고 하더라”는 답변으로 당시의 식사공간은 소규모나 단위공간이 아닌 남성과 여성집단으로 각각 행해졌을거라 짐작된다. 또한, 아침식사에 대한 중요성도 엿볼 수 있다. 한편, 1931년 박재규가 사망한 이후 아들인 박정업 역시 박재규와 같은 식사공간을 점유하게 된다.

“남파랑 정업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다들(손자들) 자기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남파, 정업할아버지가 계실 적에만 같이 식사하고 안 계시니까 각자 알아서 하는 거지. 여자들은 그때도 방에서 같이 먹지 않고 따로 부엌이나 초당채에서 먹었다 하더라. 우리 조부님(박준삼)때부터 한데 모여 같이 식사하기 시작했다.” (박경중 2021.04.07.)

박재규와 박정업의 시기에는 남녀 구분이 명확하게 분리되고, 집안의 어른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가족의 식사모습이 그려진다. 즉, 남파고택에서는 가부장적 체제하의 남녀구분을 지속하고, 상하의 위계질서를 연장자에 부여함으로써 그 중심에는 박재규와 박정업이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전통적인 사회에서 식당이라는 공간이 없었고, 어른이 거처한 공간에서 식사를 하였다. 이를 재해석하면, 당시 남파고택에서 안채는 여성이 아닌, 남성들의 주된 생활공간이었으며, 안채를 중심으로 한 주변 공간(초당) 등이 여성의 생활공간이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편, 박준삼 시대에 “한데 모여 같이 식사하기 시작했다”는 증언에서 이 시기부터 가부장적 체제에 따른 남녀구분과 위계질서가 완화된 시기로 보이며, 남녀의 주생활 공간이 바뀌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는 오늘날까지 지속해 오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 박경중씨는 “세상 따라 사는 거다”라는 짧은 답변으로 남녀 구분과 위계에서의 변화를 대변해 주고 있다. 따라서 박씨가는 근대기에도 조선 시대의 생활습성을 남녀 구분과 위계질서를 식사행위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시간의 흐름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생활의 편의성으로 바뀌어 갔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4. 가계계승

주거 안에서 인간의 생활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삶의 방식도 변화해 가며, 그 변화에 따라 주택을 이용하는 방식도 달라져 간다. 대가족을 거느리며 130여년의 시간을 간직해 온 남파고택도 예외는 아니다. 근대기 남파고택에 있어서 박경중씨는 그의 선대들의 가계계승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옛날에는 제일 윗사람이 사랑채 방을 점하고 대 이을 사람이 사랑채 작은방에서 살았다. 그런데, 남파 할아버지(박재규)는 정업 할아버지(박정업)한테 우리집 오른쪽 땅에 작은집을 지어줬다. 장가들고 거기서 살았다고 한다.” (박경중 2021.04.14.)

박경중씨의 증언처럼 유교의식에 따른 전통사회에서의 가계계승은 사랑방을 점하고, 대를 이을 장자는 사랑방의 하위 공간에서 기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24) 그러나 위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장자는 본채에 남아 가계를 이어가고 장자는 분가한다. 장자는 연장자가 없을 때 비로서 가계를 계승하는 형태를 가진다. 차남이나 삼남이 아닌 장남을 위해 집을 따로 지은 일은 전라도 지방에서는 박씨일가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차남이나 삼남의 집을 본채 주위에 짓고 살림을 내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같은 전라도 지방의 영광읍 조씨 집에서는 차남과 삼남의 집을 본채 왼쪽에 나란히 지었으며, 본채와 아들집 사이의 골목 위로 구름다리를 놓고 왕래하였다. 경상남도 창녕군 성씨집과 충청남도 아산군 송악면 외암리의 이씨 집도 마찬가지다.25)

Table 3.

Method of Family Line Succession

DivideHead of HouseholdThe eldest son
Traditional MethodSarang-chae
Sarang-Bang
Sarang-chae
Subordinate Space of
Sarang-bang
Park’s FamilyAn-chae
An-bang (Keun-bang)
Sarang-chae

한편, 박정업은 박재규가 마련해 준 별도의 집이 있었음에도 사랑채에 기거하였으며, 박정업이 집안의 가장이 됐을 동안에는 박준삼이 거처하게 된다.

“정업할아버지는 작은집이 있었는데 나중에 본집 사랑채로 들어오셨다 하더라. 그러고 나서 정업할아버지가 안채로 들어가니 우리 조부(박준삼)가 거처하셨다. 사랑채에 사시다 윗대가 돌아가시니 거기를(안채) 본인 뜻대로 하신 게 아닌가 싶다.” (박경중 2021.0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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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6.

Family Line Succession in Houses

박씨일가는 가계계승에 대해서 형태만 유지하고 방식은 독자적으로 변해간다. 즉, 박씨일가의 가계계승은 사랑채를 점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전통사회에서의 가계계승의 방법이었던 방의 대물림이 장소의 대물림으로 행해져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장과 장자와의 공간적 관계에서도 안채의 안방이 사랑채의 사랑방을 의미한 것이며, 그 하위 공간으로 사랑채가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IV. 의례와 공간이용

1. 의례공간과 의식행위

상례는 관혼상제 중 하나로 사람이 죽은 후 장사 지내는 예법이다. 전통적으로 마루로 구성된 대청 혹은 안방에서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며, 객사했을 경우 집안 사정에 따라 다른 장소에서 행해지기도 한다.26) 박씨일가는 주로 안채의 큰방에서 행해졌다.

“재규, 정업할아버지는 큰방(안채)에서 사시다 돌아가시고, 그 다음에 우리 조부(박준삼)는 여기서(사랑채) 사시다가 돌아가신다고 할 때, 호흡만 하셔서 거기(안채 큰방)로 옮겨서 거기서 이틀인가 사셨다. 그리고 그 전에 우리 할머니도 돌아가시려고 할 때 거기로(안채 큰방) 옮겨서 돌아가시고, 아버지(박승근)는 밖에서 돌아가셔서 병원에서 가시게 하고, 아무튼 다 큰방에 모셨다. 큰방에 모셔서 거기서 상을 치른다.” (박경중 2021.04.07.)

박씨일가에서는 죽음을 맞이하는 절차, 즉 상례에 있어서는 남녀구분이나 상하위계 없이 안채의 큰방(안방)이 상징적 장소가 된다. 또한, “다 큰방(안방)에 모셨다. 큰방에 모셔서 거기서 상을 치른다”라는 것으로부터도 안방은 죽음 앞에서는 집안의 가장 위계가 높은 장소가 된다. 객사한 박승근의 경우 집안에 들이지 않고 외부공간에서 행해졌으며, 당시 병원이 그 역할을 하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시대적으로 보아도 매우 드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한편, 상례 절차 중 발인과정에서 출상을 앞두고 안방과 대청 사이의 방문턱에서 망자를 위한 의례가 행해진다.

“안채에서 나올 때 방문턱에 박바가지를 놔뒀다. 큰방에 시신을 모시다가 다 내 갖고 출상을 하는데, 그래 갖고 관을 들고 바가지를 문턱 위에 두고 하나, 둘, 셋에서 딱 깨고 나가더라고. 왜그냐면 옛날에는 과학이 발달 안 했기 때문에 방문턱을 나올 때 놀라 깨서 정신 차려 나올 수도 있고(망자가) 또 쪽박 깬다는 것은 살아생전에 이제 음식은 밥은 끝났다는 이야기인거지. 살아생전에 끝난 거다.” (박경중 2021.04.14.)

일반적으로 바가지를 깨는 행위는 액운을 쫓는 주술적 행위로 결혼이나 함들이, 이사 시 액땜을 위해서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박씨일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즉, 고인을 보내기 위해 아쉬운 마음에 망자가 다시 깨어날지 모르는 희망을 바가지 깨는 행위로 그 마음을 달랬을 거라 짐작된다. 또한, 바가지를 실생활로 연관 지어, 이것을 깨는 행위는 이승에서의 생활이 끝났음을 확인시킨다.

“옛날에는 바가지로 쌀도 뜨고, 거의 모든 것을 했다.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다 바가지로 해결한다. 바가지로 씻기도 하고 물도 뜨고 음식도 만들고….” (박경중 2021.04.14.)

위의 행위는 망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의식을 통해 조상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며, 결국 생활과 연관 짓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남파고택에서는 출산에 있어서도 안채의 안방에서 행해진다.

“아기는 큰방(안방)에서 낳는다. 작은방에 있다가도 아기는 큰방에서 들어와서 낳는다. 누구나 그렇다. 할아버지는 따로 계시니까 애기 엄마는 낳고 작은방으로 간다. 낳기만 하고. 여기가 큰방인께 여기서 낳제, 작은방에서는 안 낳는다.” (박경중 2021.04.07.)

임종과 마찬가지로 출산 장소에 있어서도 큰방(안방)은 상징적 공간이다. 제사 장소에 있어서는 안채의 대청에서 행해진다. 별도의 사당이 존재하지 않아 단지를 대청에서 모시고 있기 때문에 제사의 장소는 대청에서 행해지는 것이라 박경중씨는 말하고 있다. 이처럼 남파고택에서의 의례공간은 삶과 죽음의 공간에 있어서는 안채의 안방이 중심공간이 되며, 조상을 모시는 행위에 있어서는 대청이 중심공간이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 민간신앙

전통사회에서 집은 물체의 의미를 넘어 생명체로서 인식하기도 한다. 바로 민간신앙이다. 삼라만상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것을 관장하는 신의 허락 아래 살아갔다.27) 남파고택 역시 민간신앙을 섬기고 있었다. 특히, 조왕제를 비롯하여 칠성님께 제를 올린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왕신께 제를 올릴 때 그전에 문 앞에도 대문앞에도 소키우고 일꾼들 사는 집이었는데, 지금 대문채 문앞 들온디 거그도 찰밥하고 나물하고 두 가지 담아다 놓는다. 지금은 안사니까. 여그 곳간(곳간채)에도 그때게 썼으니까 놓고, 부엌에 놓고. 초당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던 집이라 해서 담아놓는다. 그래서 한다. 장독대는 본래가 차린다. 칠성님, 장독님도 계시니까 차라 놓고. 장독대가 북쪽에가 있은께 칠성님도 계신다 하고 빌고 인사도 드리고 근데 지금은 줄였다. 내가 줄이자고 했다. 힘이 드니까.” (박경중 2021.04.14.)

박씨일가에서는 조왕신과 칠성님이 민간신앙으로 보여진다. 특히, 칠성님은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이름이다. 수명과 재복을 관장하는 이 신은 절에도 칠성각이 있을 정도로 불교와 연관이 깊다.28) 또한 조왕은 본질적으로 화신이다. 조왕신은 화신이라는 성격상 부엌(정재)의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부녀자들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린 것 중 하나이다.29) 조왕제는 각 지방별로 특색이 있지만, 집안의 안녕과 자녀의 공을 빈다는 점과 부엌이 중심장소가 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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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7.

Place for Folk Beliefs

박씨일가에서는 민간신앙 특히, 조왕신과 칠성님께 제를 올리는 장소는 부엌을 중심으로 대문앞(대문채), 곳간채, 장독대로 이들 각각의 장소는 음식을 만드는 곳, 음식이 들어오거나 보관하는 곳으로서 주로 식생활에 관련된 장소를 제의 영역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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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8.

Jungjae (Kitchen) and Jangdokdae

초당채는 남파고택 최초 박승희가 거주한 장소로서 본래 제를 행할 장소는 아니지만, 음식을 놓는 것은 그들을 신앙적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면담 내용 중 “초당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던 집이라고 해서 담아놓는다. 그래서 한다.”라는 증언으로부터도 본래 제가 행해질 장소는 아니라는 의미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남파고택의 민간신앙은 집안과 자녀의 안녕에 대한 이념을 넘어 실용적인 면으로 활용되고 있다. 더욱이 “내가 줄이자고 했다. 힘이 드니까”라는 증언으로부터도 조왕신과 칠성님의 본질이 점차 현실적이고 실용적으로 반영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V. 결 론

본 연구는 국가민속문화재 중 하나인 남파고택을 중심으로 거주자 측면 즉, 내부인의 관점에서 주거의 이용법을 밝혀보려고 한 것이다. 주거 안에서의 인간의 생활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삶의 방식도 변화해 가며, 그 변화 속에서 주거의 이용방식도 달라져 가기 때문이다. 특히, 박씨일가의 주거생활상을 추적하여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해방이후, 오늘날까지 시대별 주의식의 변화를 당시 거주자를 통해 그 일면을 밝혔다.

전통주택에서의 생활은 유교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장유유서, 가부장제, 남녀유별 등에 의해 가내질서가 형성되고 이용되어왔다. 그러나 시대변화에 따라 삶의 방식이 바뀌고, 거주의 방식도 변해간다.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남파고택에서 박씨일가의 생활의 장으로부터 살펴본 것이다. 즉, 주택에서의 규범과 이념이 아닌, 실제 거주자의 생활 모습으로부터 거주공간의 특징을 읽어내었다.

남파고택에서는 사회정세에 따라 공간 사용방법이 다르게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사랑채 여자는 안채라는 기거장소에 따른 이념보다는 거주자의 생활환경과 사회상황에 따라 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가계계승 방법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방법이었던 방의 대물림이 장소의 대물림으로 행해져 행태만 유지하고 방식은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의례와 민간신앙에 있어서는 본질만 유지하고 생활의 편의성을 추구하며 점차 현실적으로 변화되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에 대해서 박경중씨는 ‘세상 따라 사는 거다'라고 언급하였듯이 전술한 시대변화에 따라 주거공간의 사용법이 달라진다는 의미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상, 남파고택의 주거공간에 대하여 당시 박씨일가 거주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본 연구를 수행함에 있어 구술과 인터뷰의 대상자가 남성이라는 점에서 남성의 입장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과 한 개인 혹은 한 집안의 특수한 사례를 일반화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연구의 한계를 갖는다는 점을 명기해 두고 싶다. 그러나 주거사와 관련된 연구에 있어서 거주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한 집안의 주거사적인 측면이 우리 사회의 변화로 인해 개인의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며 이것은 당시의 사회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시사한 바, 주거사 연구에 미력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Notes

[1] 1) Hong, H. O. (2005). Various Perspectives to Read the Micro-History of Korean Housing after the Period of Opening the Port, Journal of Families and Better Life 23(5), 79-92.

[2] 2) 거시적인 역사적 구조보다는 인간 개인의 작은 역사를 중심으로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관찰하고 탐색하는 역사연구의 방법.

[3] 3) Oh. M. J. & Ryoo. S. L. (2022). Meaning of Housing Through Oral Life History-Experience of an Old Woman Living in an Old House for more than 80 Years. Journal of the Korean Housing Association. 33(2). pp. 55-63.

[4] 4)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 Naju-si. (2017). A Report of Korean Traditional Houses, Naju Nampa old house No. 263. Naju-Si Press.

[5] 5) Kim. K. U. (2009). 박장흥댁. Seoul: Minsokwon Press.

[6] 6) Kim. K. T. (2003). A Case Study of Agricultural Management by the Naju Pak Family during the Old Korea through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Daedong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44, 113-179.

[7] 7) Park. J. k. (2003). Trend of ‘Hyangli’ which is native from Naju area in Modern age of Korea-the fouse is a family of ‘Milyang Park’. Daedong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44, 83-112.

[8] 8) 박경중씨는 현재의 남파고택에서 낳고 자란 인물로 현시점에서 가장 연장자이며, 나주문화원(1987-1994) 원장을 역임하는 등 역사와 문화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다.

[9] 9) Oh. M. J. & Ryoo. S. L. (2022). Ibid, p. 55.

[10] 10) 심층면담은 내부인의 관점에서 인간과 거주와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거주자의 주거생활에서 사물과 공간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거주’란 거주자의 삶과 물체로서의 집이 통합된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면담의 방식은 주거생활의 전반적인 측면에서 점차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질문으로 전개된다. 면담은 총3회(2021년 4월 中)에 걸쳐서 이루어졌으며, 1차는 건축의 증축과 신축에 따른 가족관계. 2차는 일상생활과 비일상생활에 관한 내용. 3차는 보완을 위한 추가 질문 등 진위여부를 위해 반복적으로 행해졌다. 또한, 인터뷰 내용은 최소한의 편집만 이루어졌다.

[11] 11)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Naju-si. Ibid. p. 45

[12] 12) 호남지방에서 가장 먼저 재림교회가 지어진 곳이 나주이다. 이근억, 김석영 두 전도사에 의해 나주에는 복음이 전파되었고, 재림교회는 근대교육도 실시하였다. [나주독립운동사]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1920년 가능 제칠일안식일교회가 전도를 목적으로 북문통에 천막을 치고 전도 강연을 시작했으며 200여명으로 교인이 증가하자 교인의 자녀교육을 목적으로 미국인 오벽 목사가 2년제의 금명학원을 설립했다. 1922년 나주 유지들의 의연금 1600여원으로 교실을 새로 건축, 4월에는 본량의숙을 개학했다.”라고 적혀있다.

[13] 13) 토지조사령, 조선총독부제령 제2호, 1912. 8. 13, 제정

[14] 14) 안채 상량문에는 “朝鮮開國五百四十三甲戌十二月二十二日辛丑丑時上梁”이라 적혀있어 1934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채는 본래 1917년에 완공되었는데, 집터의 기가 너무 세기 때문에 집안의 불운이 겹쳐 상량문을 교체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안채 지붕과 대문채 등의 막새기와에서 병진년(丙辰年) 명문 기와가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 병진년은 1916년이므로 이는 기와의 제작 시기로 볼 수 있다.

[15] 15) 아래채의 상량문은 확인할 수 없으나, 박경중씨는 안채와 동일한 해에 건립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16] 16) 바깥사랑채 대청마루 상부 종도리묵서로 “朝鮮開國五百四十一年壬申四月二十五日辛卯未時定礎同月初七日壬寅巳時上梁”

[17] 17) 문간채상량문 “六十五年壬申九月初二日乙未巳時竪柱同日午時上梁”

[18] 18) 곳간채상량문 “朝鮮開國五百四十一年乙亥三月二十日戊辰辰時定礎同日未時立柱同日申時上梁”

[19] 19) 헛간채상량문 “檀紀四千二百九十年丁酉四月初九日丁酉未時上梁”

[20] 20) Kim. K. U. (2009). Ibid. p. 35

[21] 21)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Naju-si. Ibid. p. 45

[22] 22) 규합총서(閨閤叢書1809년)나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1670년)에 기록된 다양한 조리법의 발달과 그 종류를 보면, 조선시대의 식생활에 대한 중요성을 엿볼 수 있으며, 특히 하루 중 아침식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23] 23) 유교에서 남녀불공식(男女不共食)이란 말은 본래 같은 밥그릇에 밥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취하나, 이를 왜곡하여 한 상 또는 한 장소에서 남녀가 밥을 먹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24] 24) Kim, B. J., & Nishigaki, Y. (2012). A Study on the place of dwelling seen from Boards, Family Successions and Religious Rites of "UNJORU" in the Joseon Dynasty: Topological theory of place on dwelling (Part 1). Journal of the Architectural Institute of Japan, 77(675), 1223-1229.

[25] 25) Kim. K. U. (2009). Ibid. p. 150.

[26] 26) Yang. S. E. (2010) Funeral Rites of Korea. Seoul: Hangilsa Press.

[27] 27) Kim. B. J. (2016). A Study on the life space of UNJORU through the testimony of residents. Journal of the Korean Housing Association. 27(1). p. 28.

[28] 28) Kim. K. U. (2009). Ibid. p. 283.

[29] 29) Korea University (1995). Korea Folks, Religion. No. 3. Research Institute of Korean Studies. Seoul: Korea Univ., Press. 96.

[30] 30) Korea University (1995). Ibid. 97-100.

Acknowledgements

본 연구는 건축공간연구원에서 수행한 “한옥정책 및 산업화 연구조사지원사업(2021)”의 결과물을 활용하여 작성함.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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