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n Housing Association

Current Issue

Journal of the Korean Housing Association - Vol. 31 , No. 3

[ Article ]
Journal of the Korean Housing Association - Vol. 31, No. 2, pp.109-116
Abbreviation: J Korean Hous Assoc
ISSN: 2234-3571 (Print) 2234-225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25 Apr 2020
Received 03 Mar 2020 Revised 20 Apr 2020 Accepted 27 Apr 2020
DOI: https://doi.org/10.6107/JKHA.2020.31.2.109

신라왕경 정방형 건물지의 평면 및 기초형식
이정미*
*정회원(주저자, 교신저자), 중부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A Study of the Square Type Building Sites in the Silla Capital
Lee, Jeong-Mee*
Correspondence to : Jeong-Mee Lee, Dept. of Architecture, Joongbu Univ., 305, Donheon-ro, Deogyang-gu, Goyang-si, Gyeonggi-do 10279, Korea. E-mail: hljmee@joongbu.ac.kr

Funding Information ▼

Abstract

In Gyeongju area, a number of square type building Sites with 450~700 cm in length are excavated. They have not found column ruins inside, and the details of the foundation are different. However, all the building sites were built on the basis of natural stone foundation, and roof tiles were excavated around the podium. Therefore, they are known as wooden structural buildings, and most of them were reported as building sites of the Unified Silla Period from the 8th to 9th centuries. It is noteworthy that different foundation type were used to construct buildings of similar size and plan in the same area at the same time. In addition, the square type building site excavated in the S1E1 district east of Hwangryongsaji was analyzed to be related to the Sil (室) of『Samguk Sagi (三國史記)』「Oksa (屋舍)」. Among the square type building sites that have been identified, the case where the age has been settled is known before the establishment of the 「Oksa (屋舍)」 (King Heungdeok9 (興德王, 834). Changes in the foundation and plan of the square type building site before and after the law will be meaningful data for the interpretation of the law.


Keywords: Silla Capital, Square Type Building Site, Foundation Type, Plan Type
키워드: 신라왕경, 정방형 건물지, 기초형식, 평면형식

I. 서 론
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2000년대에 들어 경주지역은 개발과 함께 소규모 발굴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으며, 한 변의 길이가 450~700 cm 크기이고 내부에서 기둥 적심석이 확인되지 않은 정방형건물지가 다수 확인되었다. 1987년부터 16년에 걸쳐 발굴이 진행된 황룡사지 동편 S1E1지구1)에서 처음 확인된 정방형 건물지는 4기의 외곽 기둥 적심석을 연결하는 줄기초 적심석과 보조기둥 적심석 등이 노출되었다. 기초의 세부유형은 다르지만 모두 적심석기초의 초석 건물지로 기단 주변에서 기와가 출토됨에 따라 중심연대가 보고되었다. 그러나 경주지역의 유적은 중복이 심하여 건물지의 선후관계 파악이 어렵고, 시기를 특정할 수 있는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 8~9세기의 통일신라시대 유구로 보고되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정방형 건물지는 동일시기에 존속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사한 규모의 건물조영에서 확인되는 기초의 차이는 주목될 만하다.

뿐만 아니라 S1E1지구에서 확인된 정방형 건물지는 선행연구(Lee, 2011)에서 『삼국사기』「옥사」조에서 규제의 대상이 되는 실(室)과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현재 확인된 정방형 건물지 가운데 비교적 구체적으로 시대가 편년된 사례는 「옥사」조가 반포(흥덕왕 9년(834))되기 이전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법령 반포를 전후한 정방형 건물지의 평면 및 기초형식의 변화는 이후 법령의 해석에 유의미한 자료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학자들의 관심을 받아온 정방형 건물지는 주로 공주 및 부여지역에서 확인된 벽주건물2)이며 수혈주거의 지상화 단계 즉 기와 건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형태로 5세기 후반에 출현하여 7세기 중반 소멸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반면 경주지역의 정방형 건물지는 전성기 통일신라시기에 집중되어, 내부공간에 기둥이 없는 평면형식 외에 벽주건물과 전혀 다른 기초형식, 기단, 기와 등 발전된 건축요소들이 확인되었다. 또한 많은 유적에서 개방형 전퇴의 적심석기초가 노출되어 백제의 벽식건물과 구분되는 고유한 평면형식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경주지역 정방형 건물지의 평면 및 기초형식의 변화양상에 관한 연구는 유구가 없는 통일신라시대 건축구조의 변천 및 문헌 해석을 위한 새로운 단서가 될 것이며, 삼국시대로부터 통일신라로 계승되는 정방형평면에 관한 계통적 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2. 연구의 범위 및 방법

신라의 수도는 도성(都城), 왕도(王都), 왕경(王京), 왕기(王畿) 등으로 부르는데, 경주지역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하며, 조방제(條坊制)가 시행된 범위만을 왕경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신라왕경의 범위는 학자에 따라 견해차가 있으나, 최근 제정 된 신라왕경법3)에 따르면 신라 및 통일신라 시기의 수도를 일컫는 말로서 주로 왕이 거주하고 정치하던 경주 및 그 인근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즉 신라왕경은 왕실과 관부를 비롯하여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던 귀족관리 및 일반인과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과 그들이 사용하였던 각종 건축물을 포함하는 시공간적인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신라왕경의 정방형 건물지에 관한 본 연구는 지역적 범위로는 경주시를 중심으로 시간적 범위로는 신라 및 통일신라시대 정방형 건물지를 대상으로 평면 및 기초의 형식을 분석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신라왕경의 황룡사지 동편 S1E1지구, 손곡동, 동천동, 첨성대 남편, 분황사지에서 확인된 11기의 정방형 건물지를 대상으로 평면형식을 분류하고, 규모 및 적심 크기 등 건축구조의 기본속성을 검토하므로 신라왕경 정방형 건물지의 특징과 변천에 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II. 정방형 건물지의 평면형식

신라왕경 건물지의 장단비는 10% 내외의 차이로 대부분 완전한 정방형에 가까우며, 평면의 형식은 단실형과 퇴칸 부가형으로 구분된다. 한 변에 부가된 퇴칸은 남향이거나 가옥의 집입 방향에 위치하므로(Lee, 2010), 본 논문에서는 전퇴형 평면으로 분류하였다.

1. 단실형

단실형 평면은 <Table 1>에서 보는바와 같이 손곡동 유적의 건물지1과 분황사지 동편 건물지16 그리고 첨성대남편에서 중복되어 확인된 14, 15건물지이다.

Table 1. 
List of Single Room Type
Bdg. Site Wide (cm) Depth (cm) Area (m2)
Songogdong 1 490 400 19.6
Bunwhangsa East 16 510 510 26.1
Chemseongdae South 14, 15 600 (550) 550 33 (30.25)

경주 손곡동 유적은 다량의 신라시대 토기가마와 각종관련 시설물, 17기의 수혈건물지와 46동의 고상식 건물지 그리고 2동의 초석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초석건물지의 위치가 전체유적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며 출토유물이 손곡동 요업집단의 중심시기와 일치하므로, 지배계층의 주거지로 보고되었다. 건물지1은 정면1칸 측면2칸이며 규모가 작은 측면(보칸)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접한 건물지 2는 보칸과 도리칸의 크기가 360 cm인 남북축의 행랑형 건물로, 남향 건물이 주택의 중심건물로 확인되었다.

분황사 중심영역에서 약간 떨어진 동서 양측에서 노출된 정방형 건물지는 조영방위 등의 조사를 통하여 분황사 전성기 이후에 건립된 속건물지로 보고되었다. <Figure 2>의 a)건물지16은 외주형 평면으로 정면3칸 측면3칸의 완전한 정방형 평면이다. b)첨성대 남편 건물지는 통일이 후 관청으로 보고 되었으며, 단실형인 14번 건물지 위에 동일한 평면과 구조의 15번 건물지가 중복되었는데, 두 건물은 시기차이가 크지 않음에도 크기를 조정하여 정면 550 cm 측면 550 cm로 완전한 정방형으로 개축되었다.


Figure 1. 
Songogdong Site4)


Figure 2. 
Single Room Type5)

<Table 1>과 <Figure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단실형의 분황사유적과 첨성대유적은 규모차이가 거의 없으나, 구조형식은 전혀 다르다. 반면, 삼국시대 유적인 손곡동 건물지의 정면 크기는 분황사지 유적과 비슷하지만 단칸이며, 측면은 2칸으로 가운데 기둥이 어미기둥 구조인 정면 진입의 목조가구식 구조일 가능성이 크다. 즉 유사한 규모의 통일신라시대 단실형 정방형 건물지는 기초형식에 따라 서로 다른 상부구조로 구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전퇴형
1) 전퇴 기본형

현재 경주지역에서 확인된 11기의 정방형 건물지 가운데 앞에서 살펴 본 단실형 건물지를 제외한 8기의 건물지는 모두 퇴칸이 시설되어 있다. <Table 2>의 전퇴 기본형은 몸체의 연장에서 퇴칸 적심기초가 확인된 사례이다.

Table 2. 
List of Front Toe-Basic Type (cm)
Bdg. Site Wide Depth Toe (D) Area (m2)
S1E1 House1-3 680 610 260 41.5
S1E1 House12-3 480 360 200 17.3
Bunwhangsa West 10 540 520 260 28

<Figure 3> 황룡사지 동편 S1E1지구에서는 1가옥과 12가옥에서 전퇴 기본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a) 1가옥의 건물지3은 1차 조영시기의 중심건물이며 b) 12가옥의 건물지3은 2차 조영시기 중심건물이다. S1E1지구는 7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으며, 전면적인 개축이 있었던 8~9세기가 2차 조영시기로 알려졌다. a) 유구는 정면2칸 측면 1칸의 몸체에 정면3칸의 퇴칸이 시설되어 몸채와 퇴칸의 기둥열이 일치하지 않는 평면구성이다. 선행연구(Lee, 2011)에서는 「옥사」조에서 실(室)을 칸의 수로 규제할 수 없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하였다. 반면 b) 유구는 전퇴의 적심초석 위치가 교란되어 있으나, 전면에 넓은 기단이 있고 몸체의 보칸에 설치된 줄기초가 전퇴까지 연결되는 구조가 확인되었다. 몸체는 정면3칸 측면2칸이지만 줄기초가 있는 퇴칸을 포함하면 정방형에 가까운 정면3칸 측면 3칸이 된다.


Figure 3. 
Front Toe-Basic Type6)

한편 <Figure 5>의 a) 분황사 서측 건물지10은 정면3칸 측면3칸의 전면에 보칸 260 cm의 전퇴가 시설되어, 전퇴를 제외하면 앞에서 살펴본 <Figure 2>의 a) 유구와 크기 및 구조가 유사하다. 전퇴 기본형의 분황사 유적이 정방형의 몸체에 퇴칸이 시설된 일반적 유형이라면, S1E1 지구 유적은 몸체와 퇴칸의 구성 수법이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2) 전퇴 돌출형

몸체의 전면에 퇴칸이 좌우로 돌출된 전퇴 돌출형 평면은 경주지역에서 확인된 정방형 건물지 가운데 가장 많은 사례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몸체 좌우로 돌출된 퇴칸과 몸체의 관계를 규정하지 못하여, 몸체와 퇴칸을 분리하여 조사한 후 이중건물지7)로 보고하기도 였다.

<Table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퇴 돌출형 평면 몸체는 완전한 정방형에 가깝다. 적심이 교란되어 정확한 위치의 확인이 어려운 황룡사지 동편 S1E1지구 2가옥 건물지1을 제외하고 퇴칸의 보칸은 모두 200 cm 정도이며, 도리칸은 몸체의 좌우로 50~90 cm 정도 확장시켜 정면3칸의 개방형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지금까지 S1E1지구 2가옥 건물지1은 전면의 넓은 기단이 주목되었으나, 타 유적과 유사한 전퇴의 초석 위치인 몸체의 좌우로 약 80 cm 떨어진 곳에 건물지의 초석열과 같은 크기의 초석이 확인되었고, 전면에 퇴칸의 적심과 같은 석열이 노출되어 전퇴 돌출형 평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Figure 6(b)>.8)

Table 3. 
List of Front Toe-Protrude Type (cm)
Bdg. Site Wide Depth Toe Area (m2)
W D
Cheomseongdae South 10 450 450 600 200 20.25
Cheomseongdae South 20 720 720 900 225 51.84
Doncheon-dong 792-3 440 450 540 200 19.8
S1E1 House2-1 520 500 630 300 26
Bunwhangsa East 17 570 570 720 200 32.5

전퇴 돌출형 평면은 분황사 유적을 제외하고 모두 줄기초가 있으며, 간주(間柱)가 있는 경우 퇴칸 초석과 몸체의 연결 방식에 약간의 차이가 확인된다. <Figure 4> b)에서 보는바와 같이 정면 3칸의 전퇴를 구성하는 4기의 적심기초에서 가운데 2기는 몸체의 적심기초와 동일축에 배치되어 몸체와 퇴칸의 유기적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Figure 4. 
Front Toe Protrude Type9)

한편, <Figure 6>의 전퇴 돌출형 사례에서는 퇴칸의 가운데 칸이 좌우 협칸에 비해 작은데, 이는 등간격인 정면 3칸의 몸체에 맞춘 퇴칸의 구성으로 볼 수 있다. 전퇴형 평면에서는 퇴의 구성이 건물의 입면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데, 좌우칸 보다 중앙칸이 작은 경우 다소 불안정한 입면이 형성되며, 이러한 퇴의 구성은 증축의 가능성도 짐작된다. 반면, <Figure 5> a) 분황사 동편 건물지17은 퇴칸의 정면칸이 등간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에 대응하는 몸체의 정면은 가운데 칸은 넓고 좌우칸이 좁다. 퇴의 구성과 몸체 칸이 유기적으로 계획된 배치라 할 수 있다.


Figure 5. 
Individual Footing Type10)

앞에서 살펴본 전퇴 기본형 가운데 S1E1 1가옥의 경우 몸체와 퇴칸의 기둥열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으나, 전퇴 돌출형 평면은 확장된 퇴칸과 몸체의 기둥열이 모두 동일 축에 위치해 있으며, 이를 조정하기 위한 의도도 확인된다. 폐쇄적인 몸체의 전면에 좌우로 돌출시킨 개방형 전퇴의 기능과 의미는 알 수 없으나, 칸의 구성적 측면에서 분황사 건물지가 가장 완결성이 높은 평면이라 할 수 있다.


III. 정방형 건물지의 기초형식
1. 독립기초 형식

신라왕경의 정방형 건물지 가운데 줄기초가 없는 독립기초 형식은 삼국시대로 알려진 손곡동 유적과 분황사 전성기 이후에 건립된 부속 건물지로 추정된 유적들이다.

앞에서 살펴 본 <Figure 1> a) 손곡동 유적은 정면1칸 측면2칸의 소규모 평면으로 6기의 적심은 직경 100 cm로 축조되었으며, 이 중 3개소는 직경 60 cm 내외의 초석이 남아있다. <Figure 2> a) 분황사 동편 건물지16은 정면3칸, 측면3칸으로 9개의 초석이 남아 있다. 모두 윗면이 평평한 직경 40~58 cm 크기의 자연석이며, 위치에 따른 초석 및 적심의 크기 차이가 거의 없다. 주칸 거리는 도리칸, 보칸 모두 170 cm 등간격이다. <Figure 5> a) 건물지17은 건물지16과 남북 중심선을 공유하므로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고 유지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보고서에는 정면3칸 측면3칸의 몸체 주칸은 모두 190 cm의 등간격으로 기록되었으나, 정면은 퇴칸 크기에 맞추어 가운데가 넓게 조정되었다.

정면3칸의 퇴칸은 240 cm의 등간격이며 몸체의 양단으로 85 cm 가량 돌출되어 있다. 몸체에 7점 퇴칸에 4점등 모두 11점의 초석이 남아 있다. 몸체의 초석은 대부분 직경 55~70 cm 크기의 부정형이며, 초석이 결실된 위치에는 직경 80 cm 가량의 적심석군이 노출되었으나 평주위치에는 심석군이 왜소한 형태로 남아 있다. 퇴칸의 초석은 화강석으로 치석한 방형주좌초석 3점 부정형초석 1점 등으로, 방형주좌초석은 한변 50 cm의 방형주좌를 양각한 75-100 cm 규모의 대형이며, 주좌가 없는 부정형 초석은 방형주좌초석과 비슷한 직경 90 cm 규모이다.

분황사 서측에서 확인된 b) 건물지 10은 북측에 퇴칸이 설치되어 있으며, 몸체는 정면3칸 측면3칸으로 초석은 10기가 노출되었는데, 동북쪽 모서리의 초석은 주좌가 있는 원형초석으로 주좌초석의 직경은 34 cm이며, 자연석의 직경은 43~63 cm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동일한 기초형식의 분황사지 유적은 몸체의 규모에 따라 초석의 크기가 커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손곡동 유적은 작은 규모임에도 초석의 크기는 분황사 유적의 가장 큰 건물지와 유사하다.

2. 줄기초 형식

줄기초 형식은 정방형 평면의 네모서리에 기둥 적심이 있으며, 기둥적심을 연결하는 줄기초가 시설된 구조이다. 고구려 및 백제의 줄기초 건물지는 줄기초 내에 간주(間柱)가 배열되어 외부로 드러나지 않지만, 신라왕경의 줄기초 건물지는 기둥 적심과 기둥을 연결하는 줄기초 적심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목조가구식구조의 기초형식이다.

줄기초 형식은 모서리기둥(隅柱) 적심과 줄기초가 있는 기본형과 우주와 간주 및 간주 사이에 줄기초가 확인되는 독립기초와 줄기초 결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기본형

첨성대 남편에서 확인된 정방형의 대형 건물지들은 적심석의 광범위한 분포와 중첩으로 전체 배치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남북축의 회랑형 건물지 및 담장과 동일한 방위축의 유기적 관계가 확인되었다.

<Figure 4>의 b) 첨성대 남편 건물지10은 몸체의 네 모서리에 초석적심석이 있으며, 적심석 사이는 줄기초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적심의 출토 양상으로 보아 <Figure 6>의 a) 동천동유적과 같이 간주(間柱)와 줄기초가 결합된 형식일 가능성도 있다. 첨성대 남편 건물지10과 동일한 기초형식으로 보고된 <Figure 2>의 b) 첨성대남편 건물지14, 15는 우주(隅柱) 초석 적심석이 있고 적심석 사이에 너비 70 cm의 줄기초가 확인되었다. 초석 적심석은 직경 100 cm 내외로 축조하였으며, 간주는 설치되어 있지 않다. 본 연구의 대상 가운데 가장 큰 규모는 <Figure 4> a) 첨성대 남편 건물지20이다. 네 모서리에 직경 140 cm의 초석 적심석을 축조하고, 적심석 사이에 100 cm 너비로 냇돌을 놓아 줄기초를 구축하였다. 지금까지 살펴 본 첨성대 남편 건물지의 조영시기는 유구의 중복관계에 따라 10호가 폐기된 후 14, 15와 20호가 건립된 것으로 보고되으며, 모두 4기의 우주(隅柱) 적심석이 줄기초로 연결되어 있고, 초석 적심석과 줄기초 적심석의 너비차이가 크지 않다.


Figure 6. 
Combination Type of Individual and Continous Footing

반면 <Figure 3> a) S1E1지구 1가옥 건물지3은 정면2칸 측면1칸의 몸체에서 직경 120 cm 가량의 적심 6기가 확인되었다. 측면1칸의 길이가 610 cm인 대규모 건물지이며, 줄기초 너비는 60 cm 내외이다. 줄기초 너비가 기둥적심 직경의 반으로 축소되어 첨성대 유적에 비해 적심의 너비가 감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줄기초의 너비는 벽체의 두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며, 벽체 두께의 감소는 벽체가 분담하는 하중의 감소와 상관성이 있다.

2) 독립기초와 줄기초 결합식

<Figure 6>의 a) 동천동 792-3번 유적은 몸체의 삼면에서 간주 초석이 노출되었다. 퇴칸에서는 직경 60 cm로 정교하게 가공된 초석2기가 확인되었으며, 몸체의 정면과 후면에서 노출된 초석의 크기도 유사하다. 몸체의 전후면 은 간주 초석 사이에 줄기초 적심을 구축하였으나 측면 은 좌우측의 기초 양상에 차이가 있다. 특히 우측의 간주초석은 전후면에서 확인된 초석의 절반정도의 크기이다. 몸체의 서측은 너비 60 cm의 줄기초만 노출되었는데, 직경 100 cm 내외의 적심 기초를 연결하고 있다. 이는 앞에서 살펴 본 기본형의 줄기초와 동일한 양상의 기초형식으로 볼 수 있으므로 보칸의 기초 형식은 줄기초 위에 간주를 배치한 구조일 가능성도 있다. 동천동 유적은 유물 분석에 따라 8C의 귀족주택으로 보고되었다.

이와 같이 동천동 유적은 정면과 측면의 칸수가 다르고, 간주의 기초 방식도 차이가 있으나, b) S1E1지구 2가옥 건물지1은 정면3칸 측면3칸에서 노출된 잔존 초석 7기 모두 직경 50 cm 내외의 덤벙초석으로 위치에 따른 크기 차이가 없다. 초석 사이에 냇돌로 설치된 줄기초가 있으며, 정면 가운데 출입문의 신방석 있다. <Figure 3>의 b) S1E1지구 12가옥 건물지3은 <Figure 6>의 b) 2가옥 건물지1과 같이 정면3칸 측면2칸의 몸체의 초석이 20 cm 내외의 냇돌을 일렬로 설치한 줄기초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주는 원형의 기둥적심기초가 분명하지만, 줄기초 석열과 소형초석이 연결된 간주의 기둥적심 기초는 확인할 수 없다.


IV. 경주지역 정방형 건물지의 특성
1. 공간규모

통일신라시대의 주택건축은 834년(흥덕왕 9)에 교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삼국사기』「옥사」조의 해석을 중심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의 수도로서 오랜 시간 왕경의 지위를 지켰던, 경주지역의 유적은 층위의 중복이 심하고, 「옥사」조 외에는 당시의 건축현황을 해석할 수 있는 사료가 거의 없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옥사」조에는 신분에 따라 건축의 규모를 장광(長廣) 즉, 가로세로의 길이로 규제하므로 연구자들은 다양한 분석을 제시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경주지역에는 중심연대가 통일신라시대로 보고된 다수의 정방형 건물지가 확인되므로, 장광(長廣)이 건축물의 정면과 측면의 길이를 의미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Table 4>는 신라왕경 정방형 건물지의 규모에 관한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대부분의 유적에 전퇴가 시설되어 있으며, 전퇴를 제외한 후면 몸체 즉 주실(主室)은 완전한 정방형이다. 통일신라시대 용척에 관한 선행연구(Kim, 2011)에서 분석된 척도 가운데 당척을 옥사조에 적용해 보면, 현재 확인된 정방형 건물지의 규모와 각 신분별로 규제하고 있는 실(室)의 규모가 모가 유사 범주에 있음을 알 수 있다.

Table 4. 
List of Square Type Building Site in the Silla Capital (cm)
Size of Square Toe Site
Wide Depth Area (m2)
480 360 17.28 S1E1 House12 Bdg. Site 3
490 400 19.6 × Songog-dong Bdg. Site 1
440 450 19.8 Doncheon-dong 792-3
450 450 20.25 Cheomseongdae South 10
510 510 26 × Bunwhangsa East 16
520 500 26 S1E1 House2 Bdg. Site 1
540 520 28 Bunwhangsa West 10
570 570 32.5 Bunwhangsa East 17
600 (550) 550 43 × Cheomseongdae South 14, 15
680 610 41.5 S1E1 House1 Bdg. Site 3
720 720 41.84 Cheomseongdae South 20

<Table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 확인된 정방형 건물지의 규모는 『삼국사기』「옥사」조의 실장광(室長廣) 24척, 21척, 18척, 15척을 당척(1척≒30 cm)으로 환산한 크기인 720, 630, 540, 450 cm과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 특히 첨성대 남편에서 확인된 건물지 3기는 당척의 규모와 정확히 일치하는데, 시기차가 거의 없이 중복된 건물지14, 15의 경우 후에 개축된 건물지15가 사방 550 cm의 정방형으로 조정되었다. 약간 위치가 조정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완전한 정방형으로 규모가 조정된 것은 법령과의 연관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S1E1지구의 경우 1가옥은 건물지3 이후 사찰의 금당이 건립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실의 크기가 21척 규모이므로 육두품의 주택이 사찰로 희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동서도로에 접한 2가옥 건물지1은 5두품에 해당하며, 간선도로인 남북도로에 면한 12가옥의 건물지3은 4두품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즉, 정방형 건물지의 규모를 「옥사」조의 측면에서 본다면 주요도로에 접한 가옥이 간선도로에 접한 가옥보다 상류계층의 주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Table 5. 
Room Size (室長廣) in 「Oksa」and Measuring Unit
Ranking 「Oksa (屋舍)」 Room Size Han·Donjin Cheok (≒25 cm) Tang Cheok (≒30 cm) Goryeo Cheok (≒35 cm)
Jingol (眞骨) 24Cheok (不得過二十四尺) 600 cm 720 cm 840 cm
Yugdupum (六頭品) 21Cheok (不過二十一尺) 525 cm 630 cm 735 cm
Odupum (五頭品) 18Cheok (不得過十八尺) 450 cm 540 cm 630 cm
Sadupum (四頭品) 15Cheok (不得過十五尺) 375 cm 450 cm 525 cm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삼국사기』「옥사」조는 이전의 법령(舊章)을 기반으로 사치를 금하기 위해 흥덕왕 9년(834)에 새롭게 반포된 검박령이다. 녹유수막새를 비롯한 다수의 와전류와 활석제 주자 등 고고학적 유물에 따라 8C 귀족층의 주거공간으로 보고된 동천동 유적은 전퇴를 제외한 정방형 주실의 규모가 「옥사」조의 4두품이 조영할 수 있는 실(室)의 크기(15尺)와 정확히 일치한다. 구장(舊章)의 존재와 함께 신라왕경에 정방형 건축물의 조영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기초형식의 변천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경주의 외곽에 위치한 손곡동 유적은 신라시대 지배계급의 목조가구식 구조이다. 비슷한 규모(20m2)의 통일신라시대 정방형 건물지는 모두 기둥적심과 함께 줄기초가 확인되는데, 손곡동 유적에 비해 정면 크기는 감소하고 측면은 확장되어 대부분 완전한 정방형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정방형 평면의 줄기초 변화양상을 목조가구식 구조에서 측면(보칸)의 확장에 따른 구조의 보강 혹은 벽식구조와 가구식구조의 결합적 측면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신라왕경에서 줄기초가 사용된 평면13) 가운데 비교적 이른 사례는 전인용사지14)에서 사찰시기 이전 즉, 7세기말에서 8세기 초로 알려져 있는 유적들이다. 이들은 모두 전후로 퇴칸이 있는 정면2칸 측면1칸의 건물지로 두 칸의 몸체 가운데 한 칸에 줄기초가 시설되어 있다. <Figure 7> 의 건물지3과 4는 사방 360 cm의 한 칸에 줄기초가 있다. 동일한 크기의 두 칸 몸채 가운데 한 칸은 개방하고, 한칸에는 줄기초를 시설하여 벽체를 구성한 것과 손곡동 유적보다 작은 주칸 등은, 줄기초가 반드시 구조를 보강하기 위한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Figure 7. 
Jeoninyongsaji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인용사지 유적의 기둥 적심석은 직경 100~130 cm 내외이며 줄기초 너비는 모두 60 cm로 넓게 구축되어 있다. 8세기 유적으로 알려진 동천동 792-3의 사례에 비해 정방형 방의 크기는 사방 100 cm 정도 작지만 줄기초 적심석의 너비는 유사하다. 또한 8~9세기유적으로 보고된 S1E1지구 2가옥 건물지1은 동천동 유적보다 큰 규모이지만 초석의 크기 및 줄기초 너비는 동일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즉, 후대로 갈수록 평면에 따른 기초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서리 기둥을 연결하는 줄기초 사이에 간주가 확인되는 줄기초 형식에서 건물하중은 주로 기둥이 받게 되므로 건물의 규모가 커지고 상부하중이 증가하게 되지만, 줄기초 너비가 작아지는 것은 상부 구조가 합리적인 체계를 갖추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유사한 규모의 정방형 건물지에서 줄기초가 시설되지 않고, 위치에 상관없이 초석 및 적심기초의 크기가 동일한 분황사지 유적은 줄기초 건물지보다 후대에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독립기초와 줄기초의 변화의 양상은 전인용사지의 십자형 건물지의 세부 기초에서 확인할 수 있다. 8세기 후반 건립되어 10세기 전반경에 폐기된 것으로 보고 된 십자형 건물지는 사방 700 cm 크기의 정방형 평면 전후에 퇴칸이 있고 좌우로 익랑이 부속되어 있다. 정방형의 중앙실은 본 연구의 사례 중 가장 큰 규모인 첨성대남편 건물지20과 유사하지만 구조는 줄기초 없이 간주만 배열된 형식이다. 정방형 평면의 모서리 기둥적심은 타원형 직경이 270~300 cm로 보고되었으나, <Figure 8>을 보면 퇴칸 및 익랑의 적심기초와 중앙실의 적심기초가 합쳐져 타원형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Figure 8. 
Cross Building site in Jeoninyongsaji

대형적심석 사이에는 직경 130 cm 내외의 간주 적심석이 전후면에 2개씩, 측면에 3개씩 배치되어 있다. 구조상 특이한 것은 <Figure 8>의 b)에서 보는바와 같이 대형적심 사이에 지면에는 드러나지 않는 줄기초가 축조되어 있으며, 줄기초 상부에 기둥 적심기초가 축조되어 있다. 십자형 건물지의 사방이 개방형이었는지, 벽체가 시설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소형적심석 지하에 설치된 줄기초는 벽체의 하중에 대한 고려로 볼 수 있다. 또한 주기둥 적심과 보조기둥 적심의 크기차이가 분명하므로, 앞에서 살펴 본 독립기초와 줄기초 결합식에서 줄기초가 지하에 배치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위치에 따른 초석 및 적심석의 크기 차이가 없는 독립기초의 분황사지 유적들은 전인용사지 십자형건물지보다 후대의 기초형식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줄기초의 노출 양상 및 기둥 적심기초 직경과 줄기초의 너비차이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기둥 적심석 직경과 줄기초 너비의 차이가 크지 않은 첨성대 건물지들의 경우 벽체가 하중을 분담하는 구조형식으로, 숨은 줄기초를 구축한 십자형건물지보다 이른 시기의 기초형식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전술한 동천동 유적의 경우 작은 규모이지만 모서리에 적심석 4기를 두고, 전후면에는 소형 초석 2기 즉 3칸으로 구성하고 좌우면은 소형초석 3기의 4칸으로 구성하여 남북축(보칸)을 보강한 것은 십자형 건물지와 유사한 형식이다. 이는 십자형 건물지와 같은 시기로 분류되는 <Figure 9>의 전인용사지 건물지6과도 같은 형식으로 볼 수 있다. 중앙실의 남북축에는 줄기초가 노출되어 있으며, 퇴칸이 부설된 전후면에는 보조적심이 확인되었다. 보칸의 보강이라는 구조적 측면에서 이들은 모두 비슷한 시기 정방형건물을 축조하기 위한 기초형식으로 볼 수 있으며, 동천동 유적은 8세기로 십자형 건물지는 8세기 후반으로 보고되었다. 또한 S1E1지구의 2가옥 건물지1은 동천동 유적보다 약간 큰 규모이지만 외주초석과 평주초석이 모두 50 cm 내외로, 적심 크기의 차이가 없으며, 정면3칸 측면3칸으로 균등한 칸의 구성을 보인다. 줄기초는 존재하지만 균등한 칸의 크기와 초성은 가구식구조로의 변천을 볼 수 있는 기초형식이라 할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정방형 평면에서 줄기초가 없는 분황사 유적들은 모두 평면의 위치와 무관하게 초석 및 적심의 크기가 동일하며, 정방형, 전퇴 기본형, 전퇴 돌출형 등 각각의 평면형식이 확인되었으나, 모두 몸체의 규모는 500 cm 이상 600 cm 미만의 일정한 규모를 나타낸다. 따라서 일정한 크기의 정방형 평면을 구성하기 위한 목조가구식 구조의 구법이 확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Table 6>은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신라왕경 정방형 건물지의 중심연대를 고찰한 표이다.


Figure 9. 
Building Site 6 in Jeoninyongsaji

Table 6. 
List of Foundation Detail of Square Type Building Site in the Silla Capital (cm)
Size of Square Foundation Detail Site
W D B.S N.S.F C.F
7C 490 400 60 100 Songog-dong Bdg. Site 1
8C 450 450 - 80 50 Cheomseongdae South 10
600 550 - 100 70 Cheomseongdae South 14, 15
720 720 - 140 100 Cheomseongdae South 20
680 610 - 120 60 S1E1 House1 Bdg. Site 3
440 450 50 100 50 Doncheon-dong 792-3
9C 480 360 - 70-80 20 S1E1 House12 Bdg. Site 3
520 500 50 100 50 S1E1 House2 Bdg. Site 1
510 510 40-58 - × Bunwhangsa East 16
540 540 43-63 - × Bunwhangsa West 10
570 570 55-70 80 × Bunwhangsa East 17
Note. B.S: Base Stone (Diameter), C.F: Continuous Footing (Width)
N.S.F: Natural Stone Foundation (Diameter)


V. 결 론

신라왕경에서 확인된 정방형 건물지는 방형의 대벽건축으로 주목받고 있는 백제 및 고구려의 유적에 비해 소수의 사례이며, 전면에 부설된 퇴칸에 대한 이해의 부족 등으로 연구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웠다. 신라왕경 정방형건물지는 모두 적심 기초의 목조 가구식구조로 보고되었으며, 대부분 정방형 실(室)의 전면에 개방형 퇴칸을 설치한 독자적인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평면형식으로 보면 정방형 실(室)의 구성에는 변화가 없으나 실(室)을 구축하기 위한 기둥 적심석과 줄기초 적심석의 구성 및 크기는 시기별로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조기둥이 출현하고 주기둥과 차이가 없어지며, 줄기초 적심석의 너비가 작아지는 것은 곧 벽식구조에서 기둥식 구조로 상부구조가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고고학적 성과로 비교적 구체적으로 편년된 건물지를 근거로 기둥적심과 줄기초 너비를 비교 분석한 결과『삼국사기』「옥사」조에서 규제하는 사방 450 cm 이상의 실(室)을 조영하기 위해서 적어도 8세기말까지는 벽체가 주로 하중을 받는 기초였으며, 9세기 이후 완전한 목조가구식구조의 정방형 건축물이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줄기초가 사라지고 기둥중심의 구조로 기초형식이 변화함에 따라 독립기초 형식의 건축물에서는 목구조의 얇은 벽체를 구성하게 되고 그에 따라 실내환경이 개선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전퇴 돌출형 평면에서도 이전시기보다 등간격의 입면을 갖추게 되는 등, 건축 계획적인 측면의 완결성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왕경에서 정방형실(室)과 전퇴가 갖는 사회문화적 의미는 알 수 없으나, 완성도 높은 형태와 공간을 갖춘 일정규모 이상의 정방형 건축물을 구축하기 위한 시도가 지속되고, 그 과정에서 검박령인『삼국사기』「옥사」조가 반포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까지 『삼국사기』「옥사」조의 해석은 완성된 목조가구식 구조의 측면에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신라왕경 정방형 건물지의 평면 및 기초형식을 비교분석한 결과 기초의 변천에 따른 상부구조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법령이 해석될 필요가 있다. 「옥사」조에 담긴 건축용어의 해석은 통일신라시대의 건축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건축구조에 관한 시도를 지속하며 신라왕경인들이 소유하고자 했던 전퇴 정방형 건축물의 의미 즉 통일신라시대 주거문화의 이해에 관한 단서 가 될 것이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19년도 중부대학교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


Notes
2) 벽주(壁柱)건물은 네 벽에 구(溝)를 파고 재차 주공을 파서 주기둥을 세운 후 그 사이에 간주(間柱)를 촘촘히 박아 벽체를 만들어 내부공간에는 기둥이 없고 벽체의 힘만으로 건물을 지탱하도록 만든 단층건물로 대벽(大壁)구조로도 불리고 있다(Shim, S. Y. & Lee, K. I. & Yim, J. T. (2015). Sabi Archeology, Seoul: Seogyeongmunhwsa. p75.)
3)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에 관한 특별법, 법률 제16779호, 2019. 12. 10. 제정
4)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Properties. (2004). Excavation Report of Gyeongju SongogdongMulcheonli Site.
7) 첨성대 남편에서 확인된 건물지10의 기단은 건물지 서단과 남단에서 각각 150 cm와 300 cm 떨어져 확인되었는데, 넓게 확보된 기단에 4개의 초석적심석이 200 cm 등간격으로 축조되어 있으나, 용도는 알 수 없는 것으로 보고되었다(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Properties. (2006). Excavation Report II of Wolseonghaeja. p.245)

Sunglim Cultural Research Institute (2006)Excavation Report of Gyeongju Dongchendong 792-3 Site. pp.19-29

8) 보고서에는 건물지의 동쪽으로 기울어진 서쪽기단 석열과 방형 건물지와 큰 폭으로 떨어져 있는 동서석열은 건물지와 조영시기가 다른 석열들이 시기차를 두고 중복된 양상으로 볼 수도 있는 가능성과 두 유구의 유기적인 잔존상태와 함께 유사한 구조의 12가옥 건물지3의 사례를 들어, 몸체의 기단석열을 기존의 기단석열로 보고, 전면의 넓은 기단은 건물지1의 개보수 과정에서 나타난 양상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로 보고되는 정방형 건물지 다수에 퇴칸이 부설되어 있으며, 몸체의 좌우에서 확인되는 초석의 양상 등이 다른 유적들과 동일하므로 건물지1의 기단은 퇴칸의 유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Properties. (2004). Excavation Report of Shilla Wanggyeong. p.108)
11) Sunglim Cultural Research Institute (2006). Excavation Report of Gyeongju Dongchendong 792-3 Site.
12) Ryoo, S. L. (2015), A Study on the Architectural Structure Properties in Silla Dynasty, Academic Symposium Maintenance and Ulilization of Sillawanggeong (坊), Silla Cultural Heritage Institute, 154-178
13) 황룡사 강당지의 동서편에서 창건가람기의 ㅁ자형 줄기초건물지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나, 상부 유적으로 일부가 파악되었을 뿐 전체 평면의 모습은 확인할 수 없다(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Properties. (1984). Excavation Report of Hwanlyongsaji. pp. 91-93).
14) 인용사는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628~694)을 위한 원찰(願刹)로 알려져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인문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그가 당의 옥중에 있을 때 신라 사람들이 그를 위해 인용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창건시기는 늦어도 7세기 말로 추정되지만, 금당지 적심하부를 비롯한 사찰관련 건물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8세기 후반경으로 보고되었다(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Properties. (2009). Excavation Interim Report of Jeoninyougsaji. p.217).
15)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Properties. (2009). Excavation Interim Report of Jeoninyougsaji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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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Properties. (2004). Excavation Report of Shilla Wanggyeong.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Proper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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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Lee, J. M. (2011). A Study on the Sil in 「Oksa」Chapter of 『Samgukksagi』, Journal of the Architectural Institute of Kore Planning & Design, 27(04), 139-146.
9.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1984). Excavation Report of Hwanlyongsaji. Daejeon: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Properties.
10. Ryoo, S. L. (2015). A Study on the Architectural Structure Properties in Silla Dynasty, Academic Symposium Maintenance and Ulilization of Sillawanggeong (叉), Silla Cultural Heritage Institute, (pp. 154-178). Gyeongju. Korea.
11. Shim, S. Y. & Lee, K. I. & Yim, J. T. (2015). Sabi Archeology, Seoul: Seogyeongmunhwasa
12. Sunglim Cultural Research Institute (2006) Excavation Report of Gyeongju Dongchendong 792-3 Site. Gyeongju: Sunglim Cultural Research Institute